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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베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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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2002년 타계한 존 롤스(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단일 주제의 철학자(one-theme philosopher)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평생 '정의(justice)'란 주제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롤스 교수가 1971년 출간한 대표작 '정의론'(황경식 옮김, 이학사)은 철학뿐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에 정의를 다루는 규범학을 복권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황경식(서울대) 교수는 오늘날 사회 및 정치철학 등 규범적 관심을 갖는 대부분 학자가 롤스의 방법론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하므로 오늘날의 학도들을 '롤스 이후의 세대(post-Rawlsian)'라 부를 정도라고 말한다.

롤스 교수는 정의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 합의한 원칙에 의해 정해진다고 본다. 이때 사회 구성원들은 '무지의 베일(the veil of ignorance)' 상태에서 정의의 원칙을 선택해야 한다. 무지의 베일이란 자신의 위치나 입장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일반적인 상황은 모두 알고 있지만 자신의 출신 배경, 가족 관계, 사회적 위치, 재산 상태 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가정이다. 자신의 이익에 맞춰 선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다. 이를 통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한 정의의 원칙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무지의 베일을 동원하면 사회적 갈등을 보다 손쉽게 해결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파업의 예를 들어보자. 근로자와 사용자는 각자 유리한 상황을 총동원해 최대한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려고 나설 것이다. 그러나 무지의 베일을 쓰고 있다면 달라진다. 근로자와 사용자 모두 자신에게 돌아올 손해가 가장 작은 쪽을 선택하게 된다. 자신의 강점과 상대방의 약점을 모르기 때문이다. 무지의 베일을 쓰면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므로 합리적 이기심에 따라 모든 사람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정의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게 롤스 교수의 가르침이다.

요즘처럼 여론이 양분된 적이 없다는 걱정들이 많다. 국가 정체성, 수도 이전, 과거사 문제 등 사안마다 여론이 첨예하게 맞서 있다. 엄연한 사실(facts)조차 각자의 입장과 가치관에 맞춰 다르게 주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로 죽기 살기로 자기 입장만 고집한다. '바보의 벽'에 갇혀 남의 얘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 전체에 커다란 무지의 베일을 씌워야할 상황이다.

이세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