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투자기업 '투명경영' 잘나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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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25일 오전 6시 영어학원 수강을 위해 경기도 안양 집을 나선 P&G쌍용제지의 최병욱 (39) 차장은 초겨울 새벽 공기가 차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대부분 국내 기업들이 지난 1년새 급여를 30%까지 줄였지만 그의 회사는 미국의 다국적기업 P&G에 인수되면서 올 1월 월급이 7% (본봉기준) 나 올라 살림살이에 한결 여유가 생긴 때문이다.

지난해 무려 3백50억원 적자였던 이 회사는 외국기업으로 탈바꿈한 이후 올 상반기 40억원의 흑자를 낼 정도로 실적이 호전됐다.

P&G가 들여온 5천8백만달러 (당시 9백50억원) 로 단기부채를 갚아 이자부담이 한결 가벼워진 데다 접대비를 대폭 줄이는 등 투명경영을 선언한 뒤 경비지출이 크게 줄고, 효율 위주의 경영방식이 도입되면서 영업도 활기를 띠고 있다.

올들어 영국 합작사로 바뀐 대유리젠트증권도 반년마다 배당해 주는 선진국의 반기배당제도를 도입하고, 주식대신 채권과 선물거래를 특화하도록 경영전략을 바꾸면서 합작 8개월만인 지난달부터 흑자 (15억원) 로 돌아섰다.

한라펄프제지는 경영난으로 지난해 12월 이후 직원 월급을 16%나 자진반납 형식으로 깎았으나 지난 7월 15일 미국 보워터를 새 주인으로 맞은 뒤 부채를 몽땅 갚고 임금도 원상회복시켰다.

외환위기 이후 1년. 국내 기업들의 장사가 죽쑨 것과 달리 국내 진출 외국기업들은 '유리알 경영' '빚없는 경영' '스피드 경영' 으로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체제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증권거래소 분석에 따르면 12월 결산 34개 외국계 상장사의 올 상반기 매출증가율은 국내 기업보다 낮았으나 당기순이익 신장률은 23%로 국내 상장기업 평균치인 마이너스 40%와 비교조차 어려운 수준이다.

본지 기획취재팀이 산업정책연구원 (원장 조동성 서울대교수) 과 공동으로 국내 진출 외국기업 50여곳을 현장취재 및 설문조사한 결과 이들은 ▶막대한 자본력 ▶투명한 경영 ▶신속한 의사결정 ▶전세계 지사망 활용 ▶철저한 예산절감 등 면에서 한국 기업보다 월등한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부패의 온상인 비자금.접대비를 외국기업 대부분이 인정치 않아 국내기업에 비해 비용누수가 한결 적은 것으로 확인됐다.

P&G쌍용제지측은 "경영권이 바뀐 뒤 영수증 없는 '기밀비' 관행을 폐지하는 등 접대비를 지난해 상반기 2억5천만원에서 올 상반기 1억1천만원으로 줄였다" 고 밝혔다.

이 회사 고위 경영진은 "외국기업의 자금사용이 스테인리스 파이프라면 한국기업은 곳곳에 구멍이 뚫린 녹슨 쇠파이프 격" 이라면서 "한국기업들도 비용지출.회계처리 등에서 투명성을 높여야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 고 말했다.

설문조사 결과 국내기업들이 과도한 금융비용 때문에 밑지는 장사를 한 것과 달리 외국기업들은 네곳중 세곳 꼴로 부채비율 1백% 미만으로 조사돼 이자부담이 가볍고 수익성도 큰 것으로 조사됐다.

조직에 군살이 없으며 구매.생산 등 각종 기업활동 때 전세계 조직망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도 강점으로 꼽힌다.

볼보기계건설코리아의 안토니 헬샴 사장은 "원료구매 때 전세계 16개국의 구매담당자가 협의해 가장 좋은 조건을 골라 원가를 절감할 수 있다" 고 말했다.

한편 최근 외국계로 바뀐 기업의 직원들은 외국인 경영진과의 영어회의, 영문 보고서 작성, 달라진 업무기준과 처리방식에 따른 '문화 충격' 이 큰데다 직장 내에서 한국적 온정주의가 사라지고 업무 강도도 높아져 스트레스를 호소하기도 한다.

조동성 교수는 "한국 경제의 경쟁력 회복을 위해 외국자본 유치만큼이나 선진 경영방식의 유치가 중요하다" 며 "신속하게 움직이면서 높은 생산성을 올리는 국내진출 외국기업의 경영을 눈여겨 봐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유규하.손병수.홍승일.이영렬.채인택.이원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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