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색은 힘이 세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8면

1 구조적인 아름다움은 디자이너 진태옥이 추구해온 화이트 셔츠의 주제 중 하나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에게 ‘트위드 재킷’이 있고, 영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비비언 웨스트우드에게 ‘뷔스티에’가 있다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진태옥에게는 ‘화이트 셔츠’라는 아이덴티티가 있죠.” 하퍼스 바자 코리아 전미경 편집장의 말이다. 그는 국내 라이선스 패션지로는 처음으로 한국 디자이너 아트 북 제작을 기획하면서 첫 번째 주인공으로 진태옥을 선정, 패션쇼까지 열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패션을 이해하려면 옷을 많이 입어봐야 한다며 정신없이 사들였던 옷장 속에 정작 한국 디자이너들의 옷은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대한민국 패션 에디터들이 큰 잘못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우리가 직접 일 년에 한 권씩 한국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아트 북을 만들자고 의견을 모았죠.”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LG 패션 플래그십 스토어에서는 디자이너 진태옥의 패션쇼가 열렸다. 화이트 셔츠를 주제로 한 이번 쇼는 패션 월간지 ‘하퍼스 바자’ 코리아가 창간 13주년을 기념하며 준비한 자리다.

올해로 패션 인생 44주년을 맞는 진태옥은 한국 패션의 초석을 다졌던 1세대 디자이너다. 1990년대 중반 파리에 진출해 세계 패션계에 한국의 존재감을 알렸고, 96년 영국의 페이든(PHAIDON)사가 발행한 ‘더 패션 북’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20세기를 빛낸 패션인 500인’에 선정된 바 있다. 간결한 라인을 좋아하는 그는 한국의 전통 소재와 문양을 현대적인 감각과 접목시킨 여성복을 주로 선보여 왔다.

이번 패션쇼의 주제가 됐던 ‘화이트 셔츠’는 진태옥 스스로 “내 디자인의 세포는 화이트 셔츠다”라고 할 만큼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그의 모든 컬렉션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 아이템이다. 29일 쇼에 등장한 40여 벌의 화이트 셔츠는 새로 제작한 게 아니라 1984년부터 현재까지 그의 무대에 등장했던 작품을 보관한 것이다.

‘패션’이라는 용어조차 생경했던 60년대부터 지금까지 외길 인생을 걸어온 디자이너의 고집스러운 발자취를 마주한 관객들은 그 무게와 가치에 기립 박수를 보냈다.

2 화이트 셔츠+검정 7부 팬츠+검정 머리띠,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 3 롤업 화이트 셔츠+3단 주름 스커트+검정 부츠, 패션 디자이너 윤한희 / 4 퍼프소매 화이트 셔츠+검정 하이 웨이스트 스커트, 모델 변정민 / 5 기본 화이트 셔츠+검정 바지+흰색 운동화+검정 배낭, 사진가 김현성 / 6 엉덩이를 덮는 길이의 박스형 화이트 셔츠+베이지 스커트+갈색 가방, 메이크업 아티스트 고원혜 / 7 남성적인 기본 화이트 셔츠+회색 데님 팬츠,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경민 / 8 기본 화이트 셔츠+면바지+흰색 운동화,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왼쪽)과 사진가 김용호


이날 행사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국 디자이너를 조명했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후배 패션 디자이너와 함께 다른 장르의 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아티스트, 사진가 등 이날 참석자들은 모두 화이트 셔츠를 기본으로 한 의상을 입었다. 블랙&화이트가 주를 이룬 이들의 옷차림이 패션 업계 종사자들답게 ‘핫한’ 스타일링을 보여준 것은 물론이다. 화이트 셔츠 하나로 주인공은 패션의 역사를, 관객은 현재의 트렌드를 보여준 자리였다.

글=서정민 기자

사진=하퍼스 바자 코리아 제공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