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고 지도자 해부] 자신감으로 사스 섬멸전에 승리한 왕치산(王岐山)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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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계를 거쳐 광둥(廣東), 하이난(海南)의 최고직 역임
1988년 왕치산(王岐山)은 중국농촌신탁투자공사 대표직에 임명된다. 역사학에서 경제연구를 거쳐 금융관리 지도자로 변신한 것이다. 중국공산당 지도층에는 만능치료제의 대명사인 '호랑이기름(萬金油)'형 지도자가 매우 많다. 당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바로 따르는 식이다.

1989년 왕치산은 차관급으로 승진 중국건설은행 부행장이 된다. 1996년에는 행장 겸 당서기로 승진한다.

1997년 그는 주룽지(朱鎔基) 총리의 지명으로 광둥성 공산당위원회 상무위원에 임명된다. 당시는 아시아 금융위기가 동남아를 휩쓸어 광둥신탁은행이 위기를 맞아 대량의 채무를 안고 파산 위기에 처한 상태였다.

왕치산은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광둥신탁은행 문제를 해결, 금융계의 스타로 데뷔한다. 이로써 그는 문제 해결의 명수로 이름을 날린다.

운세는 사람 하기 나름이다. 왕치산은 2000년 국무원경제체제개혁판공실 주임 겸 당서기로 발령받으며 장관급으로 승진한다.

2002년 16차 당대회에서 왕치산은 중앙위원에 선출된다. 그 뒤 하이난(海南)성 당서기로 자리를 옮긴다.

왕치산은 고급간부자제들인 태자당 특유의 ‘도련님’ 기질이 없다. 업무처리가 뛰어나다. 이상도 품었다. 시야도 넓다. 그는 하이난으로 옮겨간 뒤 1개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조사연구에만 몰두했다. 2007년 초 하이난성 양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그는 “하이난을 중화민족의 사계절화원, 전국인민의 휴양지로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베이징 시장 자리로
16차 당대회는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 양파 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권력구조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베이징시를 보면 당서기 류치(劉淇)는 장쩌민이 발탁한 인물이고, 시장 멍쉐눙(孟學農)은 공청단파 대장인 식이다.

그러나 이 멍쉐눙은 취임할 겨를도 없이 사스 문제에 휘말린다. 사스가 베이징을 습격하고 주변지대에 만연했는데 장원캉(張文康) 위생부장과 베이징시 사스대책소조 조장 류치, 부조장 멍쉐눙은 베이징은 안전하며 사스는 곧 억제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 간부들의 일관된 사고 방식은 좋은 소식은 보도하고 나쁜 소식은 전하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성과는 최대한 과장하고 자신은 만능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나쁜 일은 이내 세상에 알려지게 마련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UN 고위 간부가 베이징 병원에서 사망함으로써 사람들은 사스의 심각성을 깨닫고 베이징 탈출 러시가 벌어진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진상을 알고 세계에 설명하기 위해 희생양을 찾을 수밖에 없게된다. 위생부장은 해임된다. 그는 장쩌민 부하 중 한 명이다. 정치적인 균형을 위해 멍쉐눙도 해고된다.

후진타오-원자바오 정권은 사스 문제를 처리할 간부를 물색한 끝에 하이난의 왕치산을 떠올린다. 왕치산이라면 장쩌민과 후진타오 양파벌 어느쪽에도 관계가 없다. ‘광둥신탁은행’ 위기를 처리해 ‘소방대’ 대장이라는 칭호도 갖고 있다. 왕치산의 베이징 전임이 결정된다.

이와 같이 하이난섬을 중국의 꽃과 공원의 도시이자 휴양지로 만들려는 왕치산의 꿈은 사라지고 하이난성 당서기에 임명된지 5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떠난다.

◆베이징 사스 박멸전 승리로 두각
사스 위기는 왕치산을 키웠다. 그의 재능을 맘껏 드러냈다.
중국공산당 정권은 일당독재체재다. 위에서 아래까지 일원화된 체제다. 정부의 동원 능력과 효율이 뛰어나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사스 섬멸전의 동원령을 발령한 후 중요한 문제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추진할 간부였다.

왕치산은 사스 섬멸전에 합격점을 받은 장군이 됐다.
2003년4월22일 왕치산은 베이징시 시장대리에 임명된다.
4월24일 왕치산은 베이징시 시장대리에 취임한 뒤 첫 시정부상무회의를 소집한다. 그는 이 30분짜리 회의에서 간부들에게 “군대에는 농담이 없다”며 이것을 확실히 기억하라고 요구한다. 덧붙여 “1은 일, 2는 2다. 누구에게나 있을 오직(汚職) 정보는 허락하지 않는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바로 보고하라. 전기(戰機)를 결코 놓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취임 하자마자 그는 베이징시 시민들의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을 돌리는데 역점을 뒀다. 왕치산이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사람들이 믿게끔 만드는 그의 자신감이다.
그는 언제나 “옛 사람이 말한 대로 자기가 자신을 못 믿으면 누구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왕치산이 대중의 신뢰를 얻는 방법은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에게 배운 것이다. 우선 사스 치료전용 샤오탕(小湯)산 격리병원을 포함해 각 병원을 돌며 대중 속으로 파고든다.
동시에 세계를 향해 잃어버린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해 그는 자신의 사무실 바로 옆에 WHO(세계보건기구) 관원을 위한 사무실을 만들어 최신 정보를 제공하고 그 분석에도 참가한다. 그래서 WHO관원이 베이징을 대신해 세계에 진실한 정보를 전하게끔 조치한다.

왕치산은 이전과는 다르게 미디어 앞에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베이징과 세계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적극적으로 알린다. 베이징이 안전을 향해 가고 있음을 전파한 것이다.

6월24일 바로 왕치산이 베이징에 사스에 도전한지 3개월 만에 WHO가 베이징 지역에 내린 ‘관광경고’를 정식으로 취소한다. 베이징을행 전염병 유행정보지구에서 제외한 것이다.
왕치산은 베이징의 사스 섬멸전에 승리했다. 동시에 그 자신을 중국 정계의 떠오르는 별로 올려놨다.

왕치산의 관운은 매우 왕성하다. 사스마저 그의 관직 생활의 발판이 됐다. 수도의 시장으로 승진한다. 후진타오 원자바오에 의해 새로운 정치 간판이 된 것이다. 게다가 그가 갖고 있는 재능을 발휘할 부총리라는 보좌를 차지하고 있다.

왕치산의 전공을 고려한다면 그는 당분간 금융을 담당할 것이다. 이 분야는 바로 중국경제의 전환기에 가장 도전적이고 리스크가 크며 절박한 개혁 프로젝트다. 왕치산의 최종 기착지는 어딜까? 지금부터 그가 달리는 방향에 눈을 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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