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65> 마음의 집, 한옥으로 지어 보시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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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1 : 얼마 전 황토로 지은 한옥에 갔습니다. 놀랍더군요. 서까래가 훤히 드러난 천장과 풀이 자라는 뜰, 볕이 드는 툇마루의 운치가 그만이었습니다.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죠. 집주인은 “만성비염으로 20년 넘게 고생했는데 한옥에 살면서 증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며 “이사온 후로 코가 한 번도 막히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왜 그렇죠?” 물었더니 “자연”이라고 답하네요. “한옥이 뭘로 지었는지 보세요. 흙과 돌, 그리고 나무로만 지었죠. 그러니 한옥에 사는 건 자연 속에 사는 겁니다.” 자연이 숨 쉴 때 집도 숨 쉬고, 집이 숨 쉴 때 사람의 몸도 숨을 쉰다는 얘기였죠.

#풍경2 : 전통 건축의 최고수로 꼽히는 이들이 대목장(大木匠)이죠. 최기영 대목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의 작업실은 한옥이었고, 자택은 양옥이었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에서 자고 나면 몸이 찌뿌드드해. 아침에 안마기로 1시간은 두들겨야 돼. 그래야 좀 걸을 만하다니까.” 그런데 작업실에서 잔 날은 아주 딴 판이라고 하더군요. “한옥에서 잔 날은 몸이 너무 개운해. 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몸을 쓸 수가 있다니까.”

참, 재밌더군요. 왜냐고요? 집 얘기가 아니라 마음 얘기로 들렸거든요. 따지고 보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의 집이죠. 그런데 집집(마음)마다 생김새가 다릅니다. 어떤 집은 창문이 하나, 어떤 집은 창문이 둘, 셋입니다. 창문의 크기도 다르고요. 벽의 재질도 다릅니다. 어떤 마음은 부드러운 황토벽이고, 어떤 마음은 딱딱한 콘크리트벽이죠.

여기서 퀴즈 하나. “그럼 나의 집(마음)은 어떤 곳일까요?” 글쎄, 잘 모르겠다고요? 답이야 집주인이 제일 잘 알겠죠. 평소 주위 사람에게 내뱉던 말을 돌아보세요. “아이, 답답해” “뭐 좀, 시원할 일 없을까?” “동해안에 가서 넘실대는 파도라도 봤으면” “지리산 노고단에 서서 바람이라도 쐬면 가슴이 뚫릴 텐데….” 그게 바로 나의 집에 대한 거주 소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죠. 동해안도, 지리산도 임시 방편이란 겁니다. 갈 때는 시원해도, 돌아오면 얼마 못 가 답답해지고 말죠. 그건 동해안, 지리산이 아니라 태평양, 히말라야, 우주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해도 마찬가지겠죠. 결국 ‘나의 집(마음)’이 문제라는 겁니다. 집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밖에서 ‘파도 한 줌’ ‘바람 한 줌’ 쥐고 와도 소용이 없다는 거죠.

그걸 절실하게 느낄 때 우리는 들여다보죠. “어디 보~자. 나의 집은 대체 어떻게 생겼나”하고 말이죠. 그렇게 내면을 들여다 보면 다들 깜짝 놀라고 맙니다. 왜냐고요? 거기에는 창문이 없으니까요. 더구나 벽은 강고하기 짝이 없죠. 그게 뭐냐고요? 세상을 향해 내가 세운 고집입니다. 그래서 햇볕도, 바람도 통하질 않습니다. 밖에서 내리는 촉촉한 소나기도 남의 일이고, 밤하늘에 흐르는 은하수도 남의 풍경이 되고 맙니다. 이 우주를 채우는 자연의 에너지, 치유의 에너지가 내겐 남의 에너지, 집 밖의 에너지에 머물고 말죠.

여기서 퀴즈 둘. 그럼 어찌할까요. 어떡해야 내 집(마음)에 볕이 들고, 바람이 들까요. 그렇습니다. “내 집은 이래야 해” “내 마음은 저래야 해”라고 미리 못박아둔 나의 고집과 나의 기대를 걷어야 합니다. 그게 내 집의 창문을 가리고 있으니까요. 걷으면 걷을수록 창문이 드러나고, 걷으면 걷을수록 창문이 더 커지죠. 그러다가 나중에는 본래부터 있던 ‘나의 집(마음)’이 드러나는 겁니다. 창문과 흙벽, 서까래와 지붕 등 온몸으로 숨을 쉬는 집 말입니다.

답답한 내 마음에 창을 내는 일. 그게 바로 명상이고, 묵상이고, 수행이죠. 창 밖을 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을 보세요. 그 집이 바로 우주입니다. 거기에는 고집이 없습니다. 가장 유연하고, 가장 조화로운 흐름만 있죠. 그래서 생명이 있는 겁니다. 나의 집도 마찬가지죠. 고집을 내려놓고 창문을 낼 때, 내 마음도 한옥이 되는 겁니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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