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북한탐험]14.개성 성균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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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5년만에 완공된 평양~개성 6차선 고속도로 1백70㎞는 오로지 사람들의 피나는 노동이 집약된 길이다.

토목공사의 이렇다 할 중장비 없이도 양쪽 지역 주민이나 군대가 동원돼 그 길이 만들어졌다.

1992년 김일성 (金日成) 주석 80회 생일을 코앞에 둔 선물이었다.

몇해가 지났는데도 바로 엊그제 개통된 것처럼 새롭다.

그도 그럴 것이 길의 물동량이 많지 않아 쉽사리 헌 길이 되지 않았다.

그 도로의 중앙분리대나 길가의 가로수는 거의 심지 않았거나 더러 심은 것도 아주 작은 키였다.

작은 나무는 애처롭다.

그런데 그 길을 지나 문득 개성 성균관에 들어서면 놀랍게도 1천년이 넘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오랜 세월의 유서 (由緖) 를 말하고 있다.

각각 33.5m, 31.4m이고 나무밑동 둘레는 7.3m, 6.7m였다.

그토록 오랫동안 살아온 나무이므로 그것은 다른 나무들에도 신 (神) 이고 사람들에게도 신에 해당된다.

어디 나라고 그 큰 나무에 대한 신앙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나무 아래 서니 가슴이 서늘해지며 절로 제사라도 지내고 싶게 고개가 숙여졌다.종교란 큰 것에 대한 작은 것의 자기확인인가.

30년 전이었다.

내가 경기도 양평 용문사를 지나갈 때 그 곳에서 1천년이 넘는 신라시대 은행나무 몇 그루에 어이가 없었던 적이 있다.

시간은 인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그때 절감했으며 옛날과 오늘이라는 시간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릴 일이 아니라고 그 나무는 나에게 가르치는 것 같았다.

개성 성균관의 두 나무는 우리에게 중세로서의 역사가 있다는 자랑을 낳는다.

행여나 근세 혹은 근대라는 시간적 근친 (近親) 으로 그동안 고려는 훨씬 덜 평가받았는지 모른다.

고려는 고도의 문화를 꽃피운 시간이다.

그런데도 성균관을 돌아보는 동안 그 곳에 모아놓은 유산의 규모가 너무 조촐한 것이었다.

그 곳은 처음에는 국자감 (國子監) 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국가의 유교기관이었다.

고려가 불교의 나라라고 하지만 신라 이래의 불교는 항상 다른 한쪽에서 유교와 함께였다.

원효의 아들 설총이 해동유교의 첫 조상으로 받들어지는 일도 그런 단초를 뜻한다.

왕건의 불.유 병행정책을 말하는 최승로의 유.불 내외설 (內外說) 이나 대각국사 의천의 유.불 일원론도 그러한 고려의 폭넓은 종합사상의 일면을 밝혀준다.

이 성균관시대를 열기 전 고려는 최충 (崔충) 의 유교 사립학교를 통해 김인존.정지상.김부식 등이 배출됐고 그 맥락이 안유 (安裕) 를 거쳐 고려말 이숭인.이색.정몽주.길재.정도전.권근으로 이어져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에 이른다.

지금의 개성 성균관은 그 혼의 계보를 남경 (南京) 이라고 불렀던 한양에 넘겨주고 지금은 개성 경공업대학으로 계승되는 셈이다.

이제, 애써 보존되고 있는 그 곳은 아무런 권위의 흔적도 없이 하나의 심심파적과 같은 유적으로 남아 있다.

오직 두 나무의 무성한 잎새만이 아직껏 울창하고 그 그늘은 짙다.

성균 (成均) 이란 이름은 음악과 관련된다.

동.서.남.북과 중 (中) 의 다섯 학원의 하나인 남의 학부 (學府)가 곧 성균관이다.

음악으로 사람의 품성을 도야하는 곳이다.

그것이 대학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어 말 그대로 학문과 인격을 균형있게 성취하는 곳이고 음악의 조율을 맞추는 '성균의 법 (成均之法)' 을 이루는 곳이다.

정몽주가 이곳 성균관 첫 박사였다.

그는 송나라 주자학을 독학으로 익혀 해동 성리학의 원조라는 칭송을 받는다.

그와 이색.길재 등은 다같이 호에 은 (隱) 자가 들어있어 고려 3은이라 했다.

그들에 대한 정적 (政敵) 이던 정도전도 정몽주에 이어 성균관 박사를 지냈다.

젊은 유생 2백여명이 입학해 북적대던 고려 유교의 현장인 그 곳에서 나는 어떤 냉기에 휩싸였다.

재일동포 일행이 와서 부랴부랴 사진을 찍고 그 곳 판매대에서 6년근 홍삼을 사들고 간 뒤 더욱 그랬다.

마치 오랫동안 제삿밥을 받아먹지 못한 귀신들의 해묵은 굶주림과 원념 (怨念) 같은 그런 냉기였다.

실제로 성균관은 성균관의 살아있는 의미는 없어진 채 개성 문화유적의 하나로만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성균관과는 상관없는 각종 유물이 소박하게 진열되고 있는 것 말고는 정작 대성전 명륜전 같은 건물들은 괴괴하다.

지난날 유생들의 숙소이던 동재.서재가 바로 박물관 전시실인데 그 곳에 세계 최초의 11세기 금속활자가 있고 그 시대의 곡식 낟알도 흡사 사리 (舍利) 이기도 한 것처럼 용케 챙겨 놓았다.

담 너머에는 성균관 분위기와는 다른 불일사 오층석탑을 멀리 옮겨다 놓았다.

하기야 개성시내 남대문에 걸린 종도 그 곳과는 인연이 없었던 연복사 종이었다.

박물관 전시실에는 이따금 풍속의 해설판이 있는데 고려의 한 시기 노비 한 사람 값이 15~50세 여자의 경우 비단 1백20필이고 남자의 경우 그보다 헐한 1백필이었다.

사내 값이 계집 값보다 싸다는 것이 왠지 통쾌했지만 여자는 아이를 낳아 노비 여럿을 생산할 수 있으므로 그 값은 결코 비싼 것이 아니었다.

옛 노예제.봉건제와 그것의 모순을 넘어선 공화제라는 것이 은연중 대비되지만 과연 오늘의 공화제 사회가 노비의 시대를 청산하고 있는가라는 역사의 자책도 있을 법 하다.

이런 노예와 또 다른 쪽에서는 5㎏짜리 쇳덩이 투구를 쓰고 싸움터에 나가는 병사의 힘겨운 얼굴이 떠올려지는 녹슨 쇠투구에도 발걸음이 멈춰졌다.

하지만 나를 붙잡는 것은 내가 전문가이건 아니건 고려청자 전시실이었다.

고려 청자야말로 세계에 내놓고 "이 이상은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예술의 절정이다.

그것은 고려시대의 것이지만 한국사 5천년의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것이지만 한국을 넘어 세계의 것이다.

청 (靑).회 (灰).녹 (綠) 색의 그 어느 것도 아닌 오묘한 중간색인데 그렇다고 그것은 중간의 애매함이 아니다.

여기 고려 비색 (翡色) 이야말로 하나의 기적일 수밖에 없는 한국의 영혼 그것이다.

나는 개성박물관에서 고려의 모든 것을 욕심내지 않았다.

실상 그 곳은 북한의 한 지방박물관일 뿐이다.

하지만 고려의 어떤 추억없이 그 곳에 내가 갔다는 사실은 북한에서의 현재 도 아니지 않은가.

글 = 고은 (시인.경기대대학원 교수)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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