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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준비 중인 '하얀거탑' 작가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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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원 작가

  2007년 드라마 ‘하얀거탑’은 큰 인기를 끌었다. 고질적인 연장방영, 상투적인 사랑타령, 천편일률 해피엔딩을 없앤 새로운 실험이 인기의 비결이었다. 하얀거탑은 외과의사 장준혁을 내세워 병원 내 권력투쟁, 인술과 기술, 인간 내면의 욕망과 갈등을 조화롭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각본 이기원, 그의 작품이다.

지난달 이기원 작가는 ‘제중원(전2권ㆍ삼성출판사)’이란 책을 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을 배경으로, 백정의 아들 황정이 신분의 제약 등의 역경을 딛고 외과의사로 성공하는 줄거리다. 황정은 조선 최초 7명의 의사 중 한 명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실존인물 박서양(朴瑞陽ㆍ1887~1940) 선생을 모델로 그렸다.

오는 11월 소설 ‘제중원’은 드라마 ‘제중원’으로 태어난다. 이 작가는 드라마 ‘강남엄마 따라잡기’의 홍창욱 PD와 손을 잡고 36부작 대본을 썼다. 이 작가는 ‘제중원’이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작품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 7일 소설가와 드라마 작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를 만났다.

-‘하얀거탑’이 워낙 인기였다. 그에 따른 후유증은 없었나.
“보통 배우들은 자기가 맡은 배역에 몰입해 얼마간 후유증을 겪는다고 한다. 하지만 난 여러 인물을 다루기 때문에 특정 인물에 빠지지 않는다. 대신 ‘글 쓰는게 너무 힘들어 다시는 글을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또 글을 쓰게 되더라.”

-‘제중원’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나.
“일본 원작인 ‘하얀거탑’을 한국 버전으로 만들면서 병원에 살다시피하며 의학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다. 한국 의학을 거꾸로 되짚어가던 도중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을 알게 됐다.”

박서양-연세대 의대 동은의학박물관 제공

-모델이 된 박서양 선생은 어떻게 알았나. (지난해 국가보훈처는 박서양 선생을 건국포장에 추서했다.-편집자 주)
“제중원에 대한 자료를 읽다가 1908년 6월 제중원 1회 졸업생 7명이 의술 개업인허가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됐다. 이중 한 명이 백정의 아들 박서양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었다. 구한 말이라는 시대적 배경도 한 몫했다. 연대 박형우 교수의 연구서 ‘제중원’을 보니 그가 중국으로 건너가 간도국민회 군의로 활약했다고 하더라.”

-소설 주인공 황정의 이름은 원래 ‘소근개’였다.
“지방별로 백정이 어떤 이름을 썼는지, 어떻게 분포됐는지에 대한 논문이 있더라. 소근개, 이것은 ‘개새끼’라는 말이다. 당시 백정에겐 돌돌이, 도야지 등의 이름이 쓰였다. 황정의 어릴 적 이름을 소근개로 짓게 됐다. 백정 신분을 감춘 뒤 의사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얻은 이름이 황정이다.

-소설 속엔 ‘수술배틀’이 나온다. 당시의 수술 장면을 그려내는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떻게 자료를 찾아야 할 지 몰랐다. 구한 말 역사책에서 수술과 조금이라고 관련된 부분이 있으면 모두 적었다. 박물관이나 도서관 등에서도 개연성만 있다 싶으면 닥치는데로 긁어모았다. 예를 들어 이렇다. 당시 수술 땐 손을 씻었는지 안씻었는지, 수술실이 따로 있었는지 없었는지, 가운은 입었는지, 수술용 장갑은 있었는지, 메스는 어떻게 생겼는지 말이다. 수술용 장갑을 묘사하려면 그 당시 우리나라에 고무장갑이 들어왔는지에 대한 조사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소설에서의 묘사는 스쳐 지나갈 수 있지만 비주얼이 중요한 드라마에서는 대충 지나갈 수 없다. 지금도 관련 자료를 계속 찾고 있는 중이다.”

-처음부터 드라마 대본도 생각했나.
“그렇다. 난 소설가다. 드라마는 영상 소설이다. 원작을 쓰고 이를 드라마로 만드는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내가 처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원작 소설이 드라마로 제작되려면 시나리오 작가가 대본용으로 각색을 한다. 각자의 작법이 다르기 때문에 이야기의 가치관이나 주제가 달라질 수 있다. 드라마가 제작되면서 원작과 다른 결말이 나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원작은 원작이 아니다.”

-앞으로 출간되는 소설은 드라마 대본으로도 내놓을 것인가.
“‘제중원’에 달려있다. 작품이 잘 되면 그렇게 하겠지만 안되면 글쎄….(웃음)”

-소설과 대본은 어떻게 다른가.
“소설 초고를 완성한 상태에서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은 두권 분량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다양한 에피소드를 놓치고 갔다. 하지만 드라마는 흥미를 끌 수 있는 장치를 많이 해뒀다. 소설과 대본을 번갈아 추가보완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소설은 540쪽, 대본은 200자 원고지 몇 장인가.
“1회 대본이 250매다. 36회 분량으로 9000매 정도 될 것이다. 1회는 몇 개월에 걸쳐 썼다. 이후엔 캐릭터가 머리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반수면 상태에서도 쓰게 된다.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는 이번 달 말까지 10회, 방송이 시작될 예정인 11월까지 20회를 써놓는 것이 목표다.”

-박용우와 연정훈, 한혜진이 확정됐다. (박용우는 황정, 연정훈은 황정과 대립각을 세우는 백도양, 한혜진은 황정이 의사가 되는 과정을 돕는 모던걸 석란역을 맡았다.-편집자 주)
“난 특정 배우를 염두하고 글을 쓰지 않는다. 홍창욱 감독 등 제작진과 캐스팅 1~5번까지 순위를 정한 뒤 배우의 스케줄 등을 고려해 ‘이 사람이 괜찮겠다’싶으면 바로 추진한다. 박용우는 어디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본인이 하고 싶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지만 웃기만 했다. 아마 우여곡절 끝에 성공한 황정이 본인과 닮아서 끌렸나보다. 한혜진은 고전미와 똘똘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홍 감독이 석란 역에 딱 맞을 것이라고 하더라. 연정훈은 백도양의 직관적인 판단과 자신만만한 태도, 냉정한 성격을 잘 표현하리라 생각된다.”

-시대적 배경이 구한 말인데 ‘사극의 블랙홀’이라고 하지 않나. 흥행이 될까.
“시청자는 승리의 역사가 있어야 드라마를 보는데 당시는 패배의 역사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의 역사에서 승리는 있을 수 있다. 황정의 경우처럼 말이다.”

제중원 수술장면-연세대 의대 동은의학박물관 제공

-제중원이 연대 세브란스의 전신인지 서울대병원의 전신인지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고 들었다.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연대 교수들께 받았다. 제중원이 어느 병원의 전신인지를 두고 문제가 된다는 건 시대의 아이러니다. 서로 달리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슬픈 역사 아닌가. 연대측은 선교사가 만든 제중원이 나중에 조선 정부에서 선교부로 이관해 세브란스 병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고 주장한다. 서울대측은 제중원이 고종이 설립한 조선 정부 소속의 왕립 병원이었기 때문에 대한의원, 조선총독부의원, 서울대병원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난 어느 편도 아니다.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혹시 어느 한쪽이 부각된다면 이야기를 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한 것으로 이해해달라.”

-최근 양의학과 한의학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집필 당시 한의학 협회에서 온 인사들이 ‘민영익 치료’묘사를 두고 감정을 드러냈다고 하더라.
“‘거짓과 왜곡의 드라마 제중원’이라는 말을 하더라. 민영익이 칼에 찔렸는데 한의원들이 상처에 송진을 발랐다는 부분이 나온다. 이를 두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한의학을 비하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상처를 꿰맨다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같은 처치를 한 것이라고 봤다. 난 편견이 없다. 수술을 한 뒤엔 몸의 기운을 다스리는 한의학으로 치료했을 것이다.”

-제중원과 황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제중원은 성장, 성공드라마다. ‘하얀거탑’의 장준혁은 현대인의 한 단면이었다. 황정 역시 현실과 비교할 수 있다. 천대받는 백정은 성공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요즘 젊은이의 심리 저변엔 '뭘 이루기 위해 열심히 해도 잘 안된다' '사회적 벽을 넘어 성공할 수 있을까' 등의 생각이 있을 것이다. 신분의 벽을 깨고 의사가 된 뒤 독립군으로 활약한 황정의 이야기가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줬으면 좋겠다.”

-앞으로의 계획은.
“일단 방송이 잘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후엔 산악소설을 쓸까 한다. 그러나 산악드라마는 흥행을 끌지 못한다고 한다. 산에 올라 인생을 찾는다는 건 너무나 식상한 주제니까. 산을 통해 우정은 어디까지 유효한가에 대해 고민해 볼 것이다. ‘자기 전에 이책 보지 마라, 잠을 못잔다’ ‘페이지 넘어가는게 너무 빠르다’ 등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소설을 쓰려고 노력한다. 책을 보다 어느 순간에 탁 막히면 손에서 책을 내려놓게 된다. 내 책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이지은 기자 사진제공:연세대 의대 동은의학박물관

소설 '제중원'을 읽은 독자를 위한 궁금증 'TIP'

-소설에는 없는 에피소드, 드라마에선 어떤 것들이 있을까.
“몇 가지 소개한다면, 수혈에 대한 것이다. 당시 조선엔 혈액형에 대한 개념이 있었을까. 어떤 기준으로 혈액형을 분류했을까. 피를 섞어 반응하는 과정을 본 뒤 수혈하는 장면 등이 나올 것이다. 심폐소생술은 어땠을까. 황정이 번개를 떠올리며 환자의 가슴에 대고 충격을 주는 장면도 나올 것이다. 옛날엔 의원에서 약을 주며 회충이 몇 마리 나왔는지 세어 가지고 오라고 했다. 이런 부분도 나올 것 같다.”

-황정의 친구 도야지가 드라마에선 이름이 바뀐다고.
“캐스팅한 친구가 너무 말랐다. 도야지는 왠지 뚱뚱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이름을 ‘작대’로 새로 지었다.”

-황정 아버지는 아들이 백정의 길을 가지 않도록 멀리 떠나보냈다. 우연히 제중원에서 일하는 아들을 보지만 애써 모른척 한다. 아버지 역엔 누가 캐스팅됐나.
“배우 장항선이다. 부성애를 잘 연기해줄 것이다.”

-황정과 석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안타깝다.
“꼭 결혼을 해야 사랑이 아니다. 두 사람의 감정이 어디까지 갔느냐, 서로를 위함이 최고점에 달했을 때 이것이 사랑이다. 황정이 군의로 갈 때 죽음을 생각하고 갔을 것이다. 사랑하는 석란은 조선에 남아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물론 석란이 황정을 만나러 가기 위해 기차를 탔을 수도 있겠지만…. 결말을 어떻게 지을지는 작가에게 맡겨달라.”

-황정을 그토록 미워하던 백도양이 마지막엔 그를 의사로서 인정한다.
“백도양이 ‘황정은 인술자, 나는 기술자였다’고 고백한다. 둘 중 누가 더 낫다고는 할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것이니까. 황정에게는 백도양이, 백도양에게는 황정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둘 다 의사로서 최고점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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