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진시인 이형기씨 신작시집 '절벽'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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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고여 있음은 삶이 아니다.

오래 축적된 지식과 제도는 우리의 삶을 관행화시킨다.

누구든 한번 밖에 누릴수 없는 삶이기에 그것을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수 없는 소중함을 지님에도 말이다.

지식과 제도에 대항해 우리에게 생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시다.

좋은 시들은 항상 세상을 맨 처음 보는 눈으로 돌려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보고간 의미만이 켜켜이 쌓인 꽃에서 시는 그 의미를 지워버리고 꽃을 맨 처음 꽃으로 돌려 놓는다.

"시인은 공부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존재다. 그러나 시인도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가 일상적 또는 과학적 차원에서 공부한 내용, 일종의 유용한 지식체계를 끊임없이 잊기위한 공부다. 그의 시적 상상력은 그렇게 잊어버린 공백의 공간을 언제나 새로운 그림으로 가득 채우게 해준다. " 중진시인 이형기 (李炯基.65) 씨의 시인론이다.

약관 (弱冠) 보다 어린 17세때인 1950년 '문예' 지로 등단한 이씨야 말로 타고난 시인.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꽃이 지는것, 스러진 청춘을 아름답게 노래한 '낙화' 를 일찌감치 남겼던 이씨는 그 절창의 세계마저도 구태의연으로 돌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세계를 보여왔다.

그런 그가 신작시집 '절벽' 을 펴냈다 (문학세계사 刊) .

"귀를 기울이면 바람소리 들린다/이제는 철 지난 늦가을 바람/부질없이 울어대는 그 헛된 소리가//…//그 소리가 불러내는 것/온갖 주검들의 생전의 모습이/환상이기에 더욱 생생하다//그러나 밖을 내다보면 여전히 무인벌판/무성한 억새 시들어 나부끼는/저 바람 속에는//깃발도 있다/훈장도 있다/잘려나간 팔다리와 모가지도 있다//실은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울려/돌아가는 날개 없는 팔랑개비//비어 있는 소용돌이가 있다" ( '저 바람 속에서' 중)

시와 시론집 20여권을 펴내며 우리 시에 끊임없이 신선한 충격을 주어왔던 이씨가 이번 시집에서는 '비움의 미학' 을 일구고 있다.

늦가을 바람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 '비어 있는 소용돌이' 속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울려 돌아간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전생도 이승도 저승도 한때 한곳에서 같이 돌아가고 있다.

해서 비어 있는 소용돌이는 시공은 물론 삶과 죽음의 분별을 너머 매양 꽉찬 새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5년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경 (死境) 을 넘어온 이씨의 몸은 펜을 못들 정도로 불편하지만 시혼만은 더욱 퍼렇게 번뜩인다.

"모든 존재는 필경 티끌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사실을 영광스럽게 노래하는 존재가 시인이다" 며 비워 티끌 같은 삶에서 새 세계를 열고 있는 것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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