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예산오용' 적당히 넘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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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백여 명이 넘는 전직 고위공직자들에게 매년 3천만 원 꼴로 최고 3년까지 과학진흥예산이 지급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빗발치고 있다.

일부는 전자우편을 통해 수혜자 명단을 낱낱이 공개해야 한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할 정도다.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 이후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큰 서민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그간 돈을 지급해온 한국과학재단은 영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한 관계자는 "정부의 위탁을 받고 규정대로 예산을 운용해 왔는데 왜 우리가 매를 맞아야 하느냐" 고 항변했다.

말 그대로는 틀린게 없다.

정부 예산 지급의 근거가 된 '전문경력인사 활용제도' 는 비록 과학계 인사가 아니더라도 고위 공직자는 물론 사기업 임원출신 등까지를 수혜 대상으로 규정에 포함시켜 놓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제도의 숨은 뜻이 '마땅히 갈데 없는 고위 퇴직 공직자의 자리 마련' 이었슴은 사업 시행 당시부터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5년여 시행한 지금 1백40명의 수혜대상자가 모두 공직인사들인 게 그 증거다.

오죽하면 당시 관계부처들마저 비난여론을 의식해 서로 미루다 '힘없는' 과기처에 이 사업을 떠맡겼을까. 이 사업은 당시 정부의 고위층 인사 한 사람이 밀어붙여 성사됐다고 한다.

관계부처였던 경제기획원.교육부.과기처.총무처 등은 모두 처음엔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었다.

그러나 거품경기로 흥청망청했던 때인지라 큰 비난도 없었고 그 뒤 국정감사에서도 몇 차례 솜방망이로 얻어 맞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요즘처럼 실직하고도 오갈 데 없는 서민들이 넘쳐나는데 과학예산을 빙자해 고위퇴직자들이 고액의 강의료를 타간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사실 공직자들의 사후 자리 보전은 이번만이 문제가 아니다.

일정기간 근무하면 자동으로 고수익의 '사' (士) 돌림 자격증이 나오는 기관이 한 둘이 아니다.

또 40~50대 명퇴 공무원 중 적잖은 이들이 수천만 원의 명퇴금을 얹어 받고 산하기관에 낙하산을 타고 들어가고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으로 끼리끼리 적당히 눈감아주던 시대는 끝났다. 세금 용처에 대한 국민들의 감시 눈길도 어느 때보다 매섭고 차갑다.

이번 과학진흥예산 오용 파문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선 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

김창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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