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리포트]제 갈길 못가는 SOC 예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정부의 내년 사회간접자본 (SOC) 예산이 올 예산 (2차추경) 보다 5% 늘었다.

액수로는 5천7백억원. 얼마 안되는 듯 하지만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 이후 어려워진 재정여건에선 꽤 늘린 숫자다.

정부는 SOC 투자확대로 '성장과 고용' 두마리 토끼를 함께 겨냥하고 있다.

당장의 예산사정은 어렵지만 중장기 성장잠재력을 유지하기 위해, 또 고용수준 유지를 위한 단기처방으로 SOC 투자를 확대한다는 논리다.

건설산업연구원 (원장 홍성웅) 이 29일 발표한 분석결과 - "내년 SOC예산 (12조원) 은 37조원에 달하는 생산유발효과, 50만3천명의 고용유발효과가 있다" - 도 같은 맥락이다.

이같은 노력에 반대는 물론 없다.

더구나 요즘은 지방재정이 바닥나고, 민자유치도 제대로 안돼 중앙의 재정지원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또 그동안 논란이던 고속철.신공항사업 등도 본격 추진해야 한다.

문제는 투자방식이다.

특히 IMF 위기를 '기회' 로 봤던 전문가들의 실망이 크다.

전문가들은 IMF 위기를 ▶SOC부문에 내재하는 비효율.중복투자 등의 관행을 제거할 기회▶정보기술 등을 이용해 저비용.고효율의 관리.운용체계를 구축할 기회▶자원절약형 교통체계를 구축할 기회 (소형차.수요관리.대중교통수단등) ▶SOC를 경직적인 관료조직에서 민간부문에 넘길 기회▶왜곡된 국토이용축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토축.도시형태 형성에 도전할 기회로 봤었다.

그러나 낭비투자가 여전하다.

정부는 6대도시 지하철계획이 대부분 과다 수요예측, 전시성 정책결정의 산물임을 뻔히 알면서도 오히려 예산을 더 늘렸다.

더구나 중앙정부가 아예 지하철운영을 떠맡을 심산인지 운영비.이자까지 물어주는 선심이다.

'일단 저질러놓고 보자' 는 식의 과거투자관행의 계속이고, 이제 6대도시는 자체 자금을 마련하느라 또 빚을 져야 한다.

중복투자는 더 심해졌다.

중부내륙.대전~진주, 중앙고속도로와 병행한 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된다.

국도와 도시계획도로 사업이 중복되는 경우도 많다.

사업타당성은 따로 따지고, 사업은 함께 해 없는 돈에 투입효과가 떨어지는 사업이 도처에서 벌어지는 셈이다.

늘어놓기 투자도 계속이다.

IMF체제 이전에 시작한 도로.지하철.철도사업을 중단한 경우가 없다.

올 추경예산에선 정치권 요구로 청주~상주, 공주~서천, 전주~함양, 부산~울산, 광주시 우회도로 등 고속도로사업이 추가됐고, 내년에도 투자는 계속된다.

교통세가 대폭 오르는 등 통행수요 감소가 뻔한데도 도로.지하철.철도사업을 이전계획대로 밀어붙인다.

반면 항만은 당초 2001년까지 83선석 건설계획을 30선석으로 수정, 투자를 대폭 줄였다.

항만물동량이 당초 전망치보다 14.4%나 감소할 것으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국회는 어떨까. 투자 규모를 더 늘릴까, 아니면 '구조조정' 의 칼을 들이댈까. 요즘 교통세 (올 추경보다 22.3%증가) 는 불필요한 통행이 아닌 필수통행인이 어렵게 내는 세금이라는 점을 국회가 인식해야 한다.

더 나아가 아예 국회가 SOC 투자관행을 바로잡는 방법도 있다.

우선 정부에 '중장기 종합투자계획' 을 요구하면 된다.

정부 예산담당관이 선별한 당년도 투자우선순위보다는 다양한 계층의 의견을 수렴해 공감대를 형성한 중장기 우선순위를 제출받아 국회가 공표하는 일이다.

국회는 또 지역별로 나눠먹기 예산배분보다는 IMF체제를 벗어나는데 기틀이 될 선도사업을 골라 집중투자하는 방식을 주장해야 한다.

이 경우 21세기 우리 국토의 포인트는 역시 서남해안이고, 이 축에 복합프로젝트를 집중하면 21세기형 신산업지대를 형성하는 시너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서울 연결망보다 서남해안 관통망, 서해안과 내륙연결망에 비중을 두고, 항만.공항도 서남해안이 우선이다.

특히 목포까지 가는 남해안 관통철도도 필요하리라 본다.

재원투입방식도 고쳐야 한다.

대형 국책사업엔 다 (多) 년도예산 시스템이 필요하다.

매년 예산액을 두고 부처간 다투기 보다 신중한 결정과정을 거친 대형사업은 확정된 '사업비.사업기간' 에 따라 자동적으로 예산이 투입되는 시스템이다.

행정부는 "필요하다" 면서도 정작 하라면 책임이 무섭고, 사업계획 자체에 자신감이 없고, 또 인센티브가 없어 안한다.

국회가 나서 고쳐주면 어떨까 싶다.

또 SOC 주체에 대한 역할분담도 국회가 중재할 일이다.

공항.항만을 계속 정부재정으로 건설.운영할지, 철도.국도의 건설.운영을 계속 중앙정부가 해야 할지, 기존 SOC시설 (또는 운영권) 을 민간.외국자본에 매각하면 어떨지 등 행정부가 부처이기주의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고질적 행정관습을 혁파하는 국회가 됐으면 한다.

음성직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