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 고급 쌀, 시드니 초밥체인 사로잡았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26호 08면

경북 서안동농협 직원이 6일 오전 안동시 풍산읍 미곡처리장 앞에서 카타르로 수출할 ‘양반쌀’을 컨테이너에 싣고 있다. 안동=신동연 기자

6일 오전 8시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의 서안동농협 미곡종합처리장(RPC). 공장 문을 열자마자 지게차가 바쁘게 움직이며 이곳에서 가공·포장한 ‘양반쌀’을 앞마당으로 옮긴다. 잠시 후 도착할 컨테이너 화물차에 수출용 쌀을 실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양반쌀은 서안동농협이 개발한 브랜드다.

쌀 수출 2년의 경쟁력

기와지붕 디자인의 로고가 있는 연갈색 포장지에는 영어와 아랍어가 나란히 쓰인 하얀 딱지가 붙어 있다. 한국산을 뜻하는 ‘프로덕트 오브 코리아(PRODUCT OF KOREA)’란 영어 문구가 선명하다.(작은 사진) 이 쌀은 부산항을 거쳐 배를 타고 다음 달 초 중동의 카타르까지 갈 예정이다. 제조연월일은 2009년 8월 6일, 유통기한은 2011년 8월 5일로 적혀 있다.

오전 10시쯤 냉장 컨테이너 차가 공장 앞에 도착했다. 20피트짜리 컨테이너 박스 옆으로는 ‘경축, 안동 양반쌀 중동 카타르 첫 수출’이란 기념 현수막이 걸려 있다. 20㎏짜리 쌀이 50포씩 가지런히 쌓인 플라스틱 팔레트는 모두 10개. 이날 수출 물량은 총 10t, 금액으로는 2000만원어치다. 지게차가 팔레트를 하나씩 컨테이너 안으로 밀어넣자 안에 있는 작업자들이 쌀을 내려 다시 차곡차곡 쌓는다. 미역·멸치·김·고사리·라면 등 국산 식부자재도 함께 싣느라 작업은 2시간 정도 걸렸다.

쌀 수출 업무를 맡은 NH무역(농협 자회사)의 김용재 팀장은 “쌀은 신선도 유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냉장 컨테이너로 수송한다”며 “내부 온도는 13도로 설정돼 있다”고 설명했다.서안동농협 김문호 조합장은 “지난해 말 양반쌀을 수출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260t, 5억5000만원어치를 해외로 실어 보냈다”며 “수출 지역도 미국·캐나다는 물론 러시아·호주·뉴질랜드·카타르까지 다양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품질을 꼼꼼하게 관리해 고급쌀을 생산하고, 안동시는 수출 물류비를 보조하며, NH무역은 해외 판로를 개척해줘 삼박자가 척척 맞는다”고 덧붙였다.

한국도 이젠 쌀 수출국이다. 오늘도 한국 쌀은 수출용 컨테이너 배에 실려 파도를 헤치며 해외 시장으로 향하고 있다. 초기엔 한국계 교민을 주로 상대했지만 최근에는 현지인 시장의 문을 본격적으로 두드린다. 특히 쌀 소비가 많으면서 입맛이 까다로운 해외 고급 초밥집이 주요 공략 대상이다.

올 상반기 쌀 수출량은 1434t으로 1년 전(106t)에 비해 12배 이상 급증했다. 20㎏짜리 쌀 포대를 기준으로 7만1700포에 해당한다. 금액으로는 244만 달러(약 30억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30만 달러)보다 일곱 배 이상 늘었다. 지난달 말까지 농수산물유통공사에서 수출 추천을 받은 물량은 1954t에 달한다. 올해 전체로는 2500~3000t의 수출이 예상된다. 아직 그렇게 많은 물량은 아니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해외 시장 진입 초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긍정적”이라며 기대를 건다.

미국·독일·카타르에도 판매
올 들어 국제 곡물시장에서 쌀값은 한국에 유리하게 움직이고 있다. 세계적인 공급 감소로 미국 등 외국 쌀값은 급등했으나 ‘원화가치 하락 효과’에 힘입은 한국 쌀값은 달러 기준으로 크게 내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까지 국제 시세보다 두 배 넘게 비쌌던 한국 쌀값이 최근에는 20~30% 정도 비싼 수준에 머물고 있다.

농수산물유통공사에 따르면 한국 쌀과 경쟁 관계인 중립종(중간 크기의 알갱이) 쌀의 국제 가격은 6월에 ㎏당 1451원 선으로 조사됐다. 2007년(평균 517원)의 세 배 가까이 뛰어올랐고, 2008년(1007원)에 비해서도 40% 이상 비싼 가격이다. 특히 쌀 수요가 많은 3~4월에는 중립종 쌀값이 ㎏당 1600원대까지 치솟기도 했다. 반면 한국 쌀값은 최근 수년간 ㎏당 2000원 안팎에서 안정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달러로 표시한 한국 쌀의 수출 단가는 ㎏당 평균 1.7달러로, 전년(2.86달러)보다 40% 넘게 떨어졌다.

나라별로는 호주가 한국 쌀을 가장 많이 사갔다. 올 상반기 호주로 수출한 쌀은 747t으로 전체 수출 물량의 절반 이상(52%)을 차지했다. 다음은 미국(221t)·뉴질랜드(139t)·캐나다(49t)·싱가포르(47t)·독일(44t)·카타르(40t)의 순이다.호주 시드니에서 13년째 무역업을 하고 있는 지니 트레이딩의 황양훈(45) 대표는 “과거 호주는 쌀을 대량으로 수출하는 나라였으나 최근에는 쌀을 수입해 먹고 있다”며 “계속되는 가뭄과 흉작도 원인이지만 미국 쌀의 저가 공세에 호주 쌀이 밀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미국 쌀값이 크게 올라 일반 소매점에선 50파운드(약 22.7㎏)짜리 한 포대에 53호주달러(약 5만4500원)에 팔린다”며 “한국 쌀은 20㎏짜리 한 포대에 49호주달러(약 5만400원) 정도여서 가격 경쟁도 할 만하다”고 현지 시장 상황을 설명했다. 가격이 별로 비싸지 않으면서 품질과 이미지가 좋은 것이 호주 시장에서 한국 쌀의 경쟁력이다.

한국 쌀이 주로 팔리는 곳은 한인 수퍼마켓이지만 점차 중국·일본계 시장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황 대표는 전했다. 그는 “시드니에서 40군데 초밥집 체인을 운영하는 ‘스시월드’에 한국 쌀을 공급하는데 상당히 반응이 좋다”며 “10월에 햅쌀이 나오면 1~2㎏의 소포장으로 울월스·콜스 등 현지인 대상의 대형 마트에도 납품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미국 시장에선 ‘한식의 세계화’ 차원에서 한국 쌀을 취급하는 식당이 늘고 있다고 뉴욕 한성식품의 장철동(51) 대표가 소개했다. 16년째 무역업을 한다는 장 대표는 “그동안 말로만 ‘한식의 세계화’를 외쳤지 실제로는 한국 식당도 거의 미국 쌀을 썼다”며 “올해는 한국 쌀을 들여와 한국 식당에 공급하는 데 각별히 공을 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미국의 일반 소매시장에선 한국 쌀이 여전히 가격 때문에 고전하고 있다고 한다. 장 대표는 “대형 할인점에서 미국 쌀은 ㎏당 약 1.32달러, 한인 수퍼마켓에서 파는 한국 쌀은 ㎏당 2.25달러 정도 한다”며 “아직은 가격 차이가 커서 ‘고향의 맛’을 원하는 교민 외에는 판매가 잘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럽은 교민보다 현지인 시장의 비중이 훨씬 큰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NH무역 김용재 팀장은 “올 들어 독일에도 44t을 수출했는데 거의 전량 일본인 시장으로 나갔다”며 “일본 쌀에 비해 가격이 싼 데다 품질은 손색이 없어 초밥집 등에서 ‘밥맛이 좋다’며 호평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한국 건설업체의 해외 공사 현장이 많은 중동 지역에서도 현지 근로자들의 단체 급식용 등으로 한국 쌀을 많이 찾고 있다.

현재 쌀 수출을 활발히 하는 곳으로는 서안동농협 외에도 전북 익산의 명천RPC와 군산의 제희RPC·대야농협, 충남 서산의 대산농협, 경기도 평택의 안중농협 등이 꼽힌다. 대부분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수출 물류비 등을 보조하는 곳이다.안동시 유경한 농산물수출 담당은 “안동에선 농산물 수출촉진자금 17억원을 예산으로 확보해 뒀다”며 “쌀의 경우 수출금액의 최대 35%까지 지역농협과 무역업체에 물류비를 지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당초 올해 30만 달러어치의 쌀 수출을 예상했으나 현재 추세라면 연말까지 100만 달러 이상 수출이 가능해 보인다”며 “추가경정 예산에 수출지원금 5억원을 추가로 반영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전북·충남·경기도 등도 해당 시·군에서 나오는 지원금과 합쳐 쌀 수출액의 3~10%를 보조하고 있다. NH무역 김용재 팀장은 “쌀은 가격에 민감하기 때문에 현재로선 지자체의 물류비 지원이 없으면 수출 단가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지자체, 최대 35% 물류비 보조
한국 쌀이 수출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는다. 해방 후 1970년대 초반까지는 쌀 부족으로 매년 보릿고개를 겪으며 쌀 수출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후 ‘기적의 볍씨’로 불리는 통일벼의 도입으로 쌀 생산량이 급증한 덕분에 보릿고개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80년대까지는 식량 자급률이 낮다는 이유로 쌀 수출은 계속 금지됐다.
96년 양곡관리법 개정으로 농림부 장관의 추천을 받으면 쌀 수출을 허용하는 규정이 마련됐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추천을 해주지 않는 방법으로 쌀 수출을 엄격히 제한했다. 농가 피해를 우려해 쌀 수입을 막고 있던 상황에서 쌀 수출을 풀어주면 시장 개방 협상에서 불리해질까 우려했다.

정부의 정책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2007년 5월이다. 시장 개방 협상이 마무리되면서 더 이상 쌀 수출을 막을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수출한도는 수입쌀의 시판용 물량 이내로 제한했다. 쌀 수입이 수출보다 많아야 ‘순수입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당시 수출 1호는 전북 군산 제희RPC가 차지했다. 2007년 6월 이곳에서 생산한 52t의 ‘철새 도래지 쌀’을 미국으로 수출한 것이다. 이후 2007년 말까지 7개월간 쌀 수출은 566t(137만 달러)을 기록했다. 그러나 지난해 쌀 수출은 358t(84만 달러)으로 크게 위축했다. 가격이 비싼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데다 한국 업체 간 과당 경쟁도 문제가 됐다.

쌀 수출 추천 업무는 지난해 4월 농림수산식품부에서 농수산물유통공사로 넘어왔다. 올해의 경우 정부가 배정한 쌀 수출한도는 4만7000t이다. 상반기 수출량(1434t)을 감안하면 사실상 자유롭게 수출이 가능하다. 다만 싸구려 저질 쌀의 수출을 방지하기 위해 수출가격은 국내 평균 산지 쌀값(㎏당 약 2000원) 이상이어야 한다는 제한이 있다.
쌀 수출이 호조를 보일수록 쌀 시장 조기개방(관세화)의 목소리가 높아질 전망이다.

한국 쌀이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것이 입증된 만큼 2014년 이후 어차피 열 수밖에 없는 국내 쌀 시장을 다소 일찍 열자는 주장이 나온다. 이와 관련,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지난달 말 한 라디오 방송에서 “9월이나 10월에 어느 정도 결론이 나올 것”이라며 “내년 1월부터 시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