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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인큐베이터 방식 vs LG전자의 프리미어리그 영입 방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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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호 24면

독일 출신 귀화인 이참(55)씨의 한국관광공사 사장 취임이 재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국적이 한국인이긴 해도 사실상 외국인인 그가 건국 이래 처음으로 공기업 최고경영자(CEO)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 사장이 조직을 어떻게 바꿔나갈지는 변화와 혁신에 목말라하는 국내 모든 기업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외국인을 공기업 사장에 앉히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나는 한국이 두렵다'의 저자인 제프리 존스 전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 회장도 한때 물망에 오른 적이 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당시 강원랜드 사장직을 제의받았었다.

삼성전자-LG전자의 상반된 ‘외국인 임원 영입 전략’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거스 히딩크 감독을 영입해 4강 진출 쾌거를 일궈낸 성공의 추억이 작용했던 것이다. 존스 전 회장의 고사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공기업 개혁의 전도사로 외국인 CEO를 영입하려는 첫 시도였다. 반면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삼성, 현대·기아차, SK, LG, 포스코 같은 대기업에서 외국인 CEO를 영입한 사례는 아직 없다. 우리보다 더 보수적인 것으로 알려진 일본 기업이 외국인 CEO 시장을 기웃거리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경영의 글로벌화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회사 전체가 ‘코스모폴리탄(세계주의) 옷’으로 갈아입으려는 시도는 많은 기업에서 진행되고 있다.
 
‘임원=글로벌 소싱’이 트렌드
주요 대기업 계열사들은 이미 적지 않은 외국인 코치(임원)를 일선에 배치했다. 대다수가 십수 년간 글로벌 기업에서 인사·마케팅 등 한 우물을 판 전문가이거나 특정 기술에 정통한 엔지니어다. 국내 기업들에 외국인 경영진의 필요성을 각인시킨 회사는 대한항공이다. 항공기 운항의 안전을 업그레이드할 요량으로 2000년 1월 미국 델타항공 운항본부장 출신인 해리 데이비드 그린버그를 부사장으로 전격 영입한 것.

당시 그는 대한항공의 구원투수로 비춰졌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그린버그 부사장 부임과 때맞춰 안전 보강 시스템을 갖춰 좋은 성과를 냈다”며 “그 무렵 다른 회사들도 외국인 경영진 영입을 본격 검토하기 시작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만 해도 이제 상무급 이상 외국인 임원이 10명에 달한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삼성전자 소속 외국인 임원의 상당수가 연구위원 또는 전문위원 직함을 갖고 일하는 연구개발(R&D) 전문가”라며 “일본·중국 등 아시아계가 많다”고 설명했다.

노지마·야마시타·코스기(이상 연구위원)와 웡이완·이누카이(이상 전문위원) 등이 바로 그들이다. 기아자동차가 2006년 9월 데려온 독일 출신의 피터 슈라이어 디자인 담당 총괄 부사장은 국내 자동차 디자인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호평 속에 스타로 떠오른 케이스다. 아우디·폴크스바겐 등 쟁쟁한 독일 자동차업체에서 쌓은 디자인 감각을 기아차에 접목시킨 공로 덕이다.

SK와 두산은 다국적기업 출신의 인사·조직 달인을 주로 영입했다. 인사와 성과 보수 체계를 대대적으로 손질하기 위해서다. SK그룹의 경우 최근 1년 반 새 주요 계열사의 인사 담당 임원을 외국인으로 물갈이했다. SK의 첫 외국인 여성 임원으로 인력관리(HR) 전문가인 린다 마이어스 부사장, SK텔레콤의 조직 개발 담당인 미국 출신 스테픈 프롤리 상무 등이다. 권오용 SK 브랜드관리 부문장은 “인사 관리를 글로벌 스탠더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선 세계 최고의 인사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최고경영진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두산은 7월 말 펩시 등에서 경력을 쌓아온 인사 전문가 찰스 홀리를 지주부문 인사 총괄(사장급)로 선임했다.

삼성전자는 자체 육성에 힘쓰고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국내 기업이 외국인 CEO나 임원 영입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데엔 나름의 고민이 있어서다. 가장 큰 걱정은 외국인에게 토종 임직원만큼의 충성심을 기대할 수 있을까다. 외국인 경영진이 한국인 임직원과 융화하지 못해 시너지를 내기는커녕 분위기만 깨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이런 가운데 전자업계의 라이벌인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외국인 임원 선발을 놓고 진행 중인 파격적인 인사 실험이 눈길을 끌고 있다. 삼성전자가 택한 방식은 한마디로 ‘인큐베이터’ 방식이다. 외국인 임원도 내국인 임원과 다를 바 없이 사내에서도 발탁하겠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업무 스타일과 성과를 꼼꼼히 지켜본 뒤 선임하는 과정이 똑같다.

삼성전자가 이런 방식을 택할 수 있는 것은 그룹 안에 독특한 외국인 인재풀을 갖추고 있어서다. 바로 미래전략그룹이다.미래전략그룹은 그룹 계열사의 각종 사업과 조직을 점검하기 위해 1997년 설립한 삼성의 인하우스 컨설팅 조직이다. 세계 명문대 출신의 석·박사급 외국인 컨설턴트가 40명가량 포진해 있다.

이들은 최소 2년간 계약을 하고 각종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그런 뒤 상당수가 계열사나 주요 사업장에 배치돼 한국인 임직원과 머리를 맞대고 일한다. 외국인 임직원에게 아무래도 떨어지는 로열티를 충전하고 한국 임직원과의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익히는 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코스인 셈이다.

2002년 외국인 출신으로는 처음 정기 임원 인사에서 별을 단 삼성전자 북미 총괄 데이비드 스틸 상무가 바로 미래전략그룹 1기생이다. 올해 정기 인사에서 상무에 오른 요한(삼성전자 사업지원팀) 역시 2003년 미래전략그룹에 합류해 삼성의 조직 문화를 익혔다. 벨기에 태생인 그는 미 하버드대 경영학 석사(MBA) 출신이다.

미래전략그룹 관계자는 “어찌 보면 이곳이 차세대 외국인 임원을 키우는 사관학교 역할도 맡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미래전략그룹에 소속된 외국인 직원들은 미국·유럽 출신이 주축을 이룬다. 하지만 2∼3년 전부터 중국·인도 등 삼성이 신흥 전략지역으로 분류한 국가 출신의 엘리트 인력이 보강되고 있다. 해당 지역의 사업 비중이 급속도로 커지면서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예비 지역 사령관’을 키워 보겠다는 포석이 깔려 있는 셈이다.

삼성이 외국인 임원을 자체 육성하는 데엔 아픈 기억도 한몫한다. 삼성은 2000년 무렵부터 계열사 사장단까지 직접 해외를 돌며 글로벌 인재 확보에 나섰다가 낭패를 봤다. 몇몇의 해외 영입파가 성과를 보여주기도 전에 보따리를 싸는 시행 착오를 겪은 것. 삼성그룹 관계자는 “여전히 해외에서 외국인 인재를 직접 데려오고 있지만 이 경우에도 업무 능력만 따지지 않고 적응 능력과 친화력을 들여다본다”고 말했다.

LG전자는 전방위 스카우트 나서
이에 반해 LG전자의 외국인 임원 영입은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외국인 선수 스카우트 방식과 흡사하다. 출신 국가·인종을 따지지 않고 실력만 있다면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데려와 바로 주전 선수로 뛰게 하는 스타일이다. 이는 80년대 후반까지도 유럽 프로 축구 무대에서 변방에 머물던 영국 프리미어리그가 세계 최고의 프로 축구 리그로 도약한 비결이기도 하다. 영국 프로축구계는 95년 외국인 선수 쿼터제를 없앴다. 이런 변화를 꾀한 덕에 92년 20%에 불과했던 외국인 선수 비중은 현재 60%에 이른다. 심지어 명문 구단인 첼시는 99년 12월 출전 선수 전원을 외국인 선수로만 짠 적도 있을 정도다.

이와 유사한 영입 시스템이 채택된 덕에 LG전자 서울 여의도 본사 최고마케팅책임자(CMO) 소속의 백승일 과장은 올 초부터 직속 보고 라인(프레드릭 르꼬끄 상무-더모트 보든 부사장)이 모두 외국인으로 바뀌었다.LG전자 남용 부회장이 2007년 말부터 최근까지 부사장급 임원을 줄줄이 외국인으로 교체한 데 이어 상무급 이상의 임원 자리도 외국인으로 채운 결과다.

최고위급 임원진만 해도 토마스 린튼 최고구매책임자, 피터 스티클러 최고인사책임자, 제임스 셰드 최고유통채널책임자, 브래들리 갬빌 최고전략책임자(이상 미국), 디디에 쉐네보 최고공급망관리책임자(스위스), 더모트 보든 최고마케팅책임자(아일랜드) 등 6명이나 된다. LG전자 경영진에서 한국인은 백우현(최고기술책임자) 사장과 정도현(최고재무책임자) 부사장 두 명뿐이다.

‘국적이 어딘가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적재적소에 최적의 인물을 배치한다’는 LG전자의 인사원칙은 외국인 임원 배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상무급 이상 외국인 임원 29명 중 21명이 해외 사업장이 아닌, 국내에서 일한다. 반대로 토종 임직원의 해외 진출은 대폭 늘었다. 최근 2년 새 해외 근무 인력은 1100명에서 1300명으로 200명가량 불어났다.

LG전자 관계자는 “외국인 임원을 크게 늘리고 이들을 요직에 앉히는 작업은 사실 세계를 무대로 뛰는 기업이라면 누구나 ‘시간 문제’인 인사 정책”이라며 “국적·출신 지역에 상관없이 회사 전 조직을 인종의 용광로로 바꿔 보겠다는 남용 부회장의 소신도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LG전자 스타일의 외국인 영입이 대세다. 최근 동부그룹 계열사인 동부하이텍은 펠리시아 제임스 아날로그 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전략 담당을 비롯해 공정·마케팅 등 전 부문에 걸쳐 외국인 임원을 한꺼번에 5명이나 영입했다.
 
외국인 대표는 ‘구단주’ 결단 사항
어느 대기업에서 외국인 대표이사 1호가 탄생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외국인 CEO 영입이 성공의 보증 수표가 될지도 확신하기 어렵다. 스타급 CEO를 영입하고도 죽을 쓰는 글로벌 기업도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당장 일본 소니만 해도 2005년 미국 출신의 하워드 스트링어 회장에게 경영 전권을 넘겼지만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세계 최고의 실력을 갖춘 국내파 CEO들은 갈수록 느는 추세다. 그래서 일각에선 외국인 CEO 무용론도 나온다. 헤드헌터인 박운영 엔터웨이파트너스 부사장은 “오너의 입김이 강한 국내 대기업 풍토상 외국인 대표이사가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점쳤다. 개인의 성과와 자신만의 경영 스타일을 중시하는 서구 출신 CEO가 오너의 경영 참여나 철학을 제대로 따를 수 있을지, 또 일사불란하게 다른 계열사 사장과 호흡을 맞추는 한국형 경영 스타일을 익힐 수 있을지 장담키 어렵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헤드헌터는 “국내 오너 기업인이 외국인 임원을 찾아달라고 부탁할 때 실력보다는 무슨 대학을 나왔는지, 또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다국적기업 출신인지 ‘간판’을 따지는 경우가 많다”고 털어놓았다. 아직까지는 외국인 경영진 영입을 대외 홍보용쯤으로 인식하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반면 주한 외국기업인 유니레버코리아의 호세 에헤시토 대표이사는 “많은 한국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만큼 여러 나라에서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고 다양한 인재를 다뤄 본 외국인 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겨도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글로벌 헤드헌터업체인 하이드릭앤드스트러글스코리아의 김재호 대표는 “유능한 외국인 CEO 영입도 중요하지만 임직원이 ‘순혈주의’를 깨고 CEO가 마음껏 경영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회사 분위기를 바꾸려는 노력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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