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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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제6장 두 행상 ⑧

새벽 5시. 그녀를 현관까지 따라나가 배웅했지만, 왜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지 묻지 않았지만, 구태여 새벽차로 가야 할 까닭이 없다는 것은 느낌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객실로 돌아서려다 말고 내처 걸어 선착장으로 나섰다.

지난 밤 성민주가 했던 말들이나, 굳이 새벽차로 떠나가기를 고집한 것은 이별에 대한 예감을 가지라는 뜻인지도 몰랐다.

예감이 적중했다 하더라도 갈등을 겪지는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방파제 끝까지 걸어 나갔다.

예감 따위로 지레 상처받는다는 것이 싫었다.

그렇다면 재빨리 현실로 뛰어들어야 했다.

여자를 배웅한 뒤 혼자서 방파제를 거니는 것도 청승맞은 짓이란 생각이 들면서 그는 곧장 돌아서고 말았다.

변씨도 벌써 깨어 있었다.

성민주의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변씨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방구석에 던져 둔 책갈피 속에서 아내의 사진을 꺼내 보였다.

혼자 있을 때, 자주 꺼내 보았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내에게 욕바가지를 퍼붓고 있었다.

"비겁한 년. 닭이 오리새끼 키운 꼴이었지. 설령 내가 구박을 했더라도 심성이 올곧게 박힌 계집이었다면 지 뱃구레로 내지른 자식새끼까지 내던지고 줄행랑을 놓았을까. 한선생까지 품앗이를 한다 해도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겠지. 한선생도 내가 안 가겠다고 버티니까 궁여지책으로 나를 회유하겠다는 심산인 것 같은데…. 까닭이야 어찌 되었든 한선생에게까지 폐를 끼치게 되어서 미안하이. 그 심사가 갸륵하구만. "

"솔직히 말해서 궁여지책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말로는 혈육이나 다름없이 지낸다면서 형님의 속 쓰린 심사를 속속들이 살피지 못한 제 불찰이 컸습니다.

마음을 바꿔주십시오. 형수님을 찾기만 하면 세 식구가 오붓하게 꾸려가면서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힘껏 도와드리고 싶어요. 그땐 형님은 주문진에 있으면서 도매상이나 선주들과 중개만 해주십시오. 옛날로 말하면 물상객주가 되는 것이지요. 지금 당장 채낚기 어선을 탄다 해도 근력 때문에 젊은 시절 같지는 못할 것 아닙니까. "

"아직은 젊은 것들과 겨뤄서 근력 부칠 것은 없지만, 형식이란 놈을 늘상 혼자 집에 두고 떠돌이 생활로만 살 수가 없어. 명색 아비로서 그보다 큰 죄가 없는 것 같애. 이러다가 저 놈도 어느 날 휑하니 집을 나가버릴 것 같거든. 계집도 없고 자식새끼까지 잃어버린 내가 이 방안에 앉아 있어 봤자 남이 보면 허수아비로만 보일 뿐이겠지. "

"나도 형식이 됨됨이를 나름대로는 유심히 관찰해 왔습니다만 그런 자발없는 짓을 저지를 애 같지는 않습니다.

집 나간 어머니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이 역력할 뿐만 아니라, 형님을 끔찍이 여겨서 험담 한번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무리한 일을 시켜도 앙탈 한번 하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단출하지만, 살림살이도 여자들 이상으로 아금받게 꾸려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형님이 집을 비운 사이에 학교 가는 것을 빼먹었습니까, 탈선해서 말썽을 피운 적이 있었습니까. 거꾸로 형님을 걱정하는 눈치가 역력한 터에 형식이를 핑계하진 마십시오. 남들은 형식이를 보고 변씨댁 호주라 합디다. "

"그래? 어느 개자식이 걔보고 변씨네 호주라 했어?" 와락 화증을 돋우며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도 아닌 방바닥에 대고 비벼 끄는 꼴이 누구라면, 당장 달려가서 요절을 낼 것 같았다. 아차 싶었던 철규는 홱 뿌리치는 변씨의 두 팔을 잡고 늘어졌다.

"왜 이러십니까. 일테면 그런 말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였지, 들었던 말이라 했습니까?" "한선생이 지어낸 말이야?" "그렇다니까요. " 그때였다.

변씨의 손바닥이 철규의 귀쌈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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