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종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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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임진왜란 때 일본 병력이 한반도에 상륙해 수도인 한양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보름이다. 부산에서 지금의 서울까지 그냥 걷기만 해도 걸리는 시간이다. 채비를 갖추면서 군사작전을 펼치는 데 필요한 한반도의 군사적 종심(縱深)이 짧았기 때문이다. 세로축에 해당하는 이 종심이 길지 않아 외침이 생겨나면 한반도는 곧 공황 상태에 빠진다.

그래서 한국은 각종 변고(變故)에 민감하다. 국가적 위기가 닥칠 때의 반응이 특히 그렇다. 1997년의 외환위기에 빠졌을 때 온 국민이 함께 ‘금 모으기’에 동참한 것은 좋은 예다. 그러나 그 진폭(振幅)이 짧은 게 흠이다. 위기를 넘기면 “그것이 언제 적 일이더냐”며 얼른 잊는다.

성공과 실패가 갈리는 승부의 세계에서도 한국인은 늘 냉탕과 온탕을 왔다 갔다 한다. 일시적인 성취에 쉽게 젖어 들지만 우쭐한 마음에 사후 관리를 소홀히 해 낭패를 불러들이는 경우가 많다. 마음이 깊지 않은 탓이다.

한반도에 비해 군사적인 종심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긴 중국의 경우는 반대다. 명(明)대에 채록된 글귀가 있다. 지금까지 민간에 널리 전해지면서 중국인들이 애송하는 글이다. “사랑과 욕됨에 놀라지 말라, 그저 저 뜰 앞의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바라본다(寵辱不驚, 閑看庭前花開花落)….”

순간의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뜻이다. 눈앞에 보이는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둘째 글귀의 여유가 퍽 새롭다. 성공과 실패, 영광과 굴욕, 기쁨과 슬픔을 장구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며 큰 승부를 향해 나아가는 담대한 자세다.

한반도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성공과 실패의 스토리는 오늘도 이어진다. 요즘 눈에 띄는 것은 한국 기업들의 약진이다. 최근 삼성SDI가 독일 BMW에 차세대 전기자동차용 리튬이온 배터리를 공급하기로 했고, LG화학도 올해 1월 미국 GM에 같은 품목의 단독 공급권을 따냈다. 이 밖에도 반도체와 이동통신·조선·자동차 등의 분야에서 나타나는 한국 기업의 활약상은 그야말로 눈이 부실 정도다.

모두 한반도의 지형적 한계에 머물지 않고 마음의 종심을 깊이 다듬고 닦아 만들어 낸 성과다. 이 점에서 보면 한반도의 진정한 승부사는 이들 기업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따져야겠지만 과거지향적 반(反)기업정서는 벗어야 한다. 이제는 그들의 분투를 격려할 때다.

유광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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