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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삼 칼럼]'제5부'의 침묵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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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흔히 언론을 행정.입법.사법부에 이은 '제4부' 라고 일컫는다.

언론의 권능이나 책무가 그만큼 막강.막중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면 '제5부' 는 어디일까. 그것은 '시민단체다' 는 게 중론이다.

그렇다.

과연 오늘날 시민단체는 그 역할로 보나 시민의 기대로 보나 제5부라는 이름을 부여받기에 별로 모자람이 없다.

국가조직은 물론 언론마저도 권위주의화.경직화.기득권화된 오늘날, 시민단체는 사회의 방부제 (防腐劑) 이자 새로운 대안이라는 찬사마저 받고 있는 중이다.

역사가 짧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시민단체들도 그러한 세계적 조류와 시대적 요구에 잘 부응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권위주의의 서슬이 아직도 퍼렇던 시절에 용기있는 성명을 적절히 발표해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던 기억을 국민들은 지니고 있다.

또 과연 어느 것이 검은 것이고 흰 것인지를 구별할 수 없게 혼란스러운 경우에, 시민단체가 어느 쪽으로 판단을 내리면 바로 그것이 확정판결 이상의 사회적 영향력을 갖곤 하던 기억들도 많다.

판단 제공만이 아니라 심지어 몸을 던져 분쟁의 해결에 직접 나서기도 했던 게 시민단체 아니었던가.

그런데 요즘엔 웬일인지 몸짓은 물론 그 목소리마저 잦아든 느낌이다.

물론 나름대로 자기위치와 목소리를 지켜 나가려는 단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단체조차 지난날과 같은 꼿꼿함이나 생기는 느끼기 힘들다고 한다면 편견이라 할 것인가.

새 정부 들어 시민운동에 관여하던 적지 않은 인사들이 직.간접적으로 새 정권에 참여하고 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관점에서 보면 필요한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 해서 시민단체 혹은 시민운동 자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면 그것은 분명 반성해야 할 일이다.

인간관계 때문에 목소리가 잦아든 것이 아니라면 제기할 문제가 원천적으로 적기 때문이라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더욱 더 큰 일이라 할 것이다.

지금 제기할 문제가 어디 한둘인가.

지난 2일 한나라당은 판문점 총격요청사건 관련 피의자들이 고문을 당했다며 몇몇 시민단체나 인권단체에 도움을 요청한 바 있다.

이것이 섣불리 개입하기 어려운 민감한 정치적 문제인 것은 틀림없고, 고문문제를 다른 정당도 아닌 한나라당이 제기한다는 것은 그 과거를 돌이켜볼 때 낯 두꺼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또 한나라당이 시민단체와 인권단체에 도움을 요청한 것도 실질적인 도움을 기대했다기보다는 다분히 여론공세적인 전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재 법원이 신체감정 등을 통해 진실을 가리고 있는 상황이니 당분간 지켜본다" 거나 "섣부른 개입은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며 입을 다물어버린 것은 너무도 실망스럽다.

사실이라면 총격요청사건은 도저히 그냥 덮어둘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다.

또 이 시대에도 고문이라니 사실이라면 이 역시 묵과할 수 없는 중대문제다.

총격요청이 사실이었다 해서 고문이 합리화될 수 없고, 고문이 있었다 해서 총격요청사건이 무마될 수 없는 별개의 두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총격사건은 총격사건대로 진실을 밝히고 고문주장은 또 그것대로 진실을 밝혀야 마땅하다.

따라서 시민단체로서는 한나라당이 요청하기 이전에 시민의 입장에서 문제제기와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청하고 나섰어야 마땅하다.

지난날에는 외압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우리 국민들은 시민단체들에 대한 기대만 크지 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하지도 않고 후원에도 인색하다.

한마디로 무임승차다.

그래서 시민단체들은 하나같이 경제적 어려움에 허덕이고 있다.

이런 단체들에게 도움은커녕 야박한 소리를 하는 게 뭣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비판기능을 접은 언론이 언론이 아니듯 감시와 고발과 비판기능을 잃은 시민단체는 참다운 시민단체가 아닐 것이다.

사회에 문제가 제기될 때, 특히 국론이 분열되고 국민들이 판단에 혼란을 느낄 때 시민단체들은 분명한 목소리로 방향을 제시해줘야 한다.

잦아든 목소리가 시민운동과 시민단체들이 애써 쌓아 놓은 권위를 무너뜨릴까 걱정이다.

유승삼(중앙M&B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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