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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연극 '땅끝에 서면…' 만배역 서희승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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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광대는 나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극단 신화의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땅끝에 서면 바다가 보인다' (김태수 작.김영수 연출) 를 공연중인 학전블루 소극장. 객석에 빼곡한 것은 20대 젊은 관객들이다.

밝아진 무대는 후줄근한 달동네 목욕탕. 한구석 이발의자에서 졸고있던 머리희끗한 이발사 만배는 불현듯 걸려온 사장의 전화에 능청스런 달변과 다변을 늘어놓는 대목에서부터 관객의 웃음을 자아낸다.

개그맨 선발대회를 앞두고 때밀이 녀석이 한바탕 연습을 벌일 때는 최신춤을 함께 추는 일도 마다 않는 만배이지만, 그런 젊은 흉내만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자는 건 결코 아니다.

웃음도 잠시. 아들의 고시공부 뒷바라지를 유일한 낙으로 알고 살아온 그가 좌절하는 대목에서 토해내는 격정에 객석에서는 흐느낌이 새어나온다.

젊은 것은 객석만이 아니다.

때밀이역의 김진만, 한국챔피언을 꿈꾸는 구두닦이역의 김상중과 최준용, 억척스런 밥집처녀역의 전현아 등 무대위에 함께 서는 배역들이 모두 10년이상 젊은 후배들. 만배는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늙은 이발사일 따름이지만, 그의 연기는 자칫 서민 신파로 흐르기 쉬운 무대에 온전한 무게를 실어준다.

"비극보다 더 진실하지 않으면 남을 웃길 수 없어요. 남을 웃기려면, 내가 웃지말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마음에 진지함이 있어야죠. " 만배 역 서희승 (46) 씨의 무대밖 말이다.

연기 경력 20여년인 그는 어쩌면 여느 대학로 관객에게는 낯선 얼굴. 72년 연수단원으로 시작한 이래, 줄곧 소속인 국립극단 무대를 벗어나지 않았던 때문이다.

외부무대에 서기는 86년 영국인 패트릭 터커가 연출했던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이후 이번이 처음. 그동안에도 한 해 네 편의 정기공연, 두 차례의 지방공연 등 국립극단 자체의 빡빡한 일정 때문에 무대를 쉬어본 적은 없다.

이번 공연 직전인 지난달에도 셰익스피어의 '십이야' 무대에 섰다.

네 귀족남녀가 제 짝을 찾아가는 이 희극에서 관객이 가장 즐거워하는 인물이 바로 그가 연기했던 광대 페스테. 귀족사회의 위선과 품위에 주눅드는 일 없이 통렬한 진실을 익살스레 읊조리는 달변 연기에 한껏 웃음이 쏟아졌음은 물론이다.

"배역운이 좋은 편" 이라고 다른 데 공을 돌리는 그는 젊은 시절 보름간의 가출끝에 아버지로부터 "연극을 하되, 한 우물을 파라" 는 조건으로 배우의 길을 허락받았다.

이해랑 이동극단을 스태프로 쫓아다니다 설사를 앓은 배우 대신 올라간 첫무대 이래로 지금까지 '한 우물' .96년 서울연극제 연기상을 시작으로 97년 히서연극상, 올봄 백상예술대상을 차례로 받은 그에게 후배들은 "뒤늦게 상복이 터졌다" 고 놀리는 모양이다.

그의 진짜 욕심은 상이 아니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다.

'햄릿 하면 김동원, 파우스트 하면 장민호 하듯' 서희승의 돈키호테를 무대위에 올려놓는 것이 꿈. '재산' 으로는 최근 시립가무단을 그만둔 아내 손혜선씨와 MBC청소년드라마 '사춘기' 의 주연이었던 아들 재경까지 모두 배우인 세 식구가 있다.

공연 14일까지.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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