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24> 林府選妃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64년 가을 베이징에서 열린 전군문예단(全軍文藝團) 무용 경연에 참석한 장닝의 모습(왼쪽 사진). 인도네시아에서 현지 무용수들에게 무용을 가르치는 장닝(오른쪽 사진 가운데). 당시 16세였다. 김명호 제공

1969년 4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9차 전국대표대회는 문화혁명과 린뱌오(林彪)의 지위를 합법화시키는 잔치였다. 린뱌오를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당장(黨章)에 명기했다. 당의 유일한 부주석이며 국방부장도 겸했다. 총참모부와 후근부, 공군과 해군까지 완전히 장악했다. 부인 예췬(葉群)도 4명의 심복과 함께 정치국에 진입했다. 린뱌오의 천하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린뱌오는 마오쩌둥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면 예췬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뒀다. 린뱌오는 예췬의 능력을 대수롭지 않게 봤지만 마오는 그 반대였다.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린뱌오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린뱌오에겐 1남1녀가 있었다. 딸은 항일전쟁 말기 옌안에서 태어났고 아들은 46년 하얼빈에서 태어났다. 둘 다 베이징대학을 졸업했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뭐든지 깊이 파고들었다. 아들 린리궈(林立果)는 “꼬마 호랑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행동했다. 방학만 되면 군 부대에 들어가 자신을 단련했다. 무선전신과 모든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뤘다. 군용트럭은 물론이고 헬기와 수륙양용 탱크, 해군 함정도 린리궈의 손에 들어가면 장난감이었다. 공군사령관 우파셴(吳法憲)은 이 23세의 청년을 공군사령부 작전부 부부장에 발탁했다. “문무를 겸전한 장군 집안의 호랑이” “전도가 무량한 소년 영웅”이라며 치켜세웠다.

나무랄 데가 없는 자녀들이었지만 예췬이 보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젊은 시절 난징의 유명한 바람둥이였던 엄마를 닮지 않고 아버지를 닮아 내성적이고 연애에 소질들이 없었다. 결혼 못할 짓들만 골라서 하고 다녔다. 린뱌오도 “애들 일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게 해라. 생각만 해도 골머리가 아프다”며 손사래를 쳤다.

린뱌오의 집안에 극장이 하나 있었다. 매일 밤 기록물이나 외국영화들을 상영했다. 단순한 귀부인에서 정치적인 ‘제2부인’으로 변신한 예췬은 밤마다 장군들을 가족들과 함께 초청했다. 최측근인 황융성(黃永勝)·우파셴·리쭤펑(李作鵬)·추후이쭤(邱會作)·장텅자오(江騰蛟)의 부인들은 고정 멤버였지만 영화는 보지 않고 예췬의 거실에 모여 린뱌오의 며느릿감 구하는 일에 몰두했다.

결혼 적령기의 미혼녀 1억여 명 중에서 한 명을 추려내자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방법과 조건을 정하는 일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미인이나 모델 선발대회 같은 것이 없다 보니 어느 구석에 뭐가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함부로 나다니기가 힘든 입장들이라 활동범위도 좁았다.

공군과 해군의 문예공작단에서 여자 연기자를 선발한다며 후보감을 물색하기로 했다. 출신 지역은 강남으로 한정했다. 강남 여자들은 아무리 화가 나도 남자를 두들겨 패는 일이 거의 없고 세수를 안 해도 표가 덜 났다. 북쪽 여자들에 비해 늙는 속도도 느렸다.

총참모부 명의로 강남 각 성의 대학과 전문학교, 극단·병원·방직공장 등 여자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극비문건을 발송했다. “얼굴에 주름살과 점이 없어야 한다. 보일 듯 말 듯한 주근깨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다. 치아가 삐뚤 빼뚤 하거나 황색이어서는 안 되고 너무 크거나 작아도 안 된다. 눈에 흰자위가 많아도 안 된다. 두발에 황색 기운이 도는 것도 안 된다. 두 손은 갸름하되 손가락이 너무 짧으면 안 된다. 부분은 하나같이 예뻐도 전체가 보기 싫으면 안 된다. 다리가 너무 길어도 안 된다. 걷는 자세가 보기 좋아야 한다. 말하는 모습을 세심히 관찰해라”며 조건도 구체적으로 명기했다.

부인네들은 지역을 분담했다. 작전 명은 ‘린푸쉬안페이(林府選妃: 임씨 왕부의 왕비 선발)’였다. 시안·쑤저우·항저우·난징·우한·창사·상하이의 해당기관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총지휘자는 예췬이었다. 미모의 여성들이 영문도 모른 채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온갖 조사를 다 받았다.

장정과 항일전쟁, 국공전쟁을 치른 여성 혁명가들이 신중국 수립 20년 만에 5000년 중국 역사상 마지막 ‘선비(選妃)’ 작업에 팔을 걷고 나섰다. 난징군구 전선가무단 무용수 장닝(張寧·당시 20세)을 최종 후보로 선정했다. 세계적인 뉴스거리였다.

장닝은 49년에 태어났다. 중화인민공화국과 동갑이었다. 일곱 살 때 부친을 잃고 열 살 때 인민해방군 예술단에 들어가 엄격한 교육을 받은 무용수였다. ‘중국청년예술가대표단’ 단원의 신분으로 15세 때부터 동남아와 동구권 국가들을 누비고 다녔다. (下에 계속)

김명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