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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고추가 한물일 때는 영양 산천이 붉게 탄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영양은 가을걷이한 고추로 천세났다.

소재지 초입으로 들어서자, 도로표지판이며 군청 건물, 그리고 보도블록에도 고추가 그려져 있었고, 심지어 군수를 비롯한 군청의 직원들 명함에도 고추마크를 새겼을 만큼 영양은 고추에 매달려 사는 고장이었다.

이 지방의 고추는 일교차가 심한 산기슭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매운맛을 유지하면서도 단맛이 있었다.

좋은 토질에 퇴비만을 사용하여 땅을 살찌우기 때문에 육질도 조밀했다.

또 물에 띄우면 잘 뜨는 성질이 있어서 타지방의 고추보다 적게 사용해도 빛깔이 곱고 씨앗도 많지 않기 때문에 예부터 명성이 있어왔던 토산품이었다.

추수한 고추는 보통 양건과 화건이란 두 가지 방법으로 건조시켜 시장으로 나오는데, 태양초로 일컫는 양건이 화건보다 구하기도 어렵고 시세도 비싼 편이었다.

추수한 생고추를 세척해서 잔류농약을 제거한 다음, 건조시킨 태양초는 한물일 때도 한근에 칠팔천원을 호가하였고, 화건한 고추는 일이천원이 싼 편이었다.

세척해서 양건시킨 고추는 생고추 열 근을 말리면 세 근 정도의 소출만 얻기 때문에 일손 바쁜 농민들이 기피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게다가 지난 여름의 오랜 장마로 흉작까지 겹쳐 좋은 고추 만나기가 손쉽지 않았다.

영양고추의 성가는 오래 전부터 소문난 것이었기에 고추가 한물이 질 때 영양장에 가보면 충청도와 전라도와 서울과 경상도 말씨를 하루 종일 귀가 따갑도록 들을 수 있었다.

좌판이 몰려 있는 읍내의 중앙초등학교 근처는 고추 흥정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장바닥 한가운데까지 들어왔다가 꼼짝없이 갇혀버린 경운기 소리, 조급증을 부리는 차량들의 경적소리, 욕설이 먼저인 흥정하는 소리로 그야말로 초장부터 난장판이었다.

사람과 마주쳤다 하면 시큼한 땀냄새가 코를 찔렀고, 장사꾼들 입에서는 금방 속이 니글거리는 막걸리 냄새였다.

한씨네는 승희에게 좌판을 펼 자리를 물색하라 이른 다음, 마침 접근하는 토박이 상인을 중개인으로 고용해서 중품의 고추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작년 이맘 때쯤의 화건 한 근 가격이 삼천사오백원의 시세였다면, 올해는 이천원 정도 오른 시세였다.

그러나 수중에 수천만원의 현찰을 보유한 외지의 중간상인들이 무차별로 사

재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게릴라전법으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목표했던 1천 근을 채운다는 것이 수월하지 않았다.

그나마 중개인에게 넉넉한 수수료를 약속한 덕분에 오후 6시경에야 가까스로 1천 근을 매입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점심 먹을 말미도 없이 장바닥을 헤매고 다니느라, 좌판 펼 자리에 남겨둔 승희의 존재까지 잊어버릴 정도였다.

놓쳐버린 끼니를 찾아먹을 겨를도 없이 그들은 승희가 얼추 펴둔 황태좌판으로 돌아 왔다.

좌판으로 돌아온 지 두 시간쯤 지난 뒤에 다음 장날을 약속하고 헤어졌던 중개인 조창범 (趙昌凡) 이가 나타났다.

한씨네가 사들인 고추를 제 자리에서 외지 상인들에게 되팔 의향을 묻기 위해서였다.

물론 한씨네가 고추를 사들인 것은 물건을 안동까지 가지고 나가서 그곳의 집하장에 넘긴다면, 백여만원의 이문은 수월하게 넘볼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용달차의 용량으로선 따로 자동차를 전세내 운임을 물어야 할 처지에 있었고, 안동까지 내왕할 동안의 경비도 부담으로 남았다.

주저하던 그들은 일단 흥정을 해보기로 하였다.

두 시간 전까지는 한씨네의 중개인이었다가 잠깐 사이에 외지 상인들의 대리인으로 안면을 바꾼 중개인이 몇 번인가 서로 얼굴을 모르는 두 상인들 사이를 뻔질나게 내왕한 끝에 드디어 흥정이 마무리되었다.

칠십만원 정도의 이문을 남기고 사들였던 고추짐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중개인이 챙긴 그 날의 수수료 수입이 통틀어 사십만원쯤 된다는 것은 나중에 안 일이었다.

학사 위에 박사가 있고 박사 위에 장사가 있다던 변씨의 말이 문득 떠올랐던 철규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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