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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냉정과 열정 사이 피렌체 Ugolino GC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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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지만 세상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는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온통 적갈색 지붕으로 가득하고 중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구시가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물론 중세 도시가 풍기는 잔잔한 아름다움으로 따진다면 체코의 프라하가 한 수 위다. 하지만 역사와 인물에 가중치를 두고 다시 가감을 해보면 피렌체를 능가할 도시는 별로 없다. 세계사를 바꾼 르네상스의 서막을 연 곳이 피렌체이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단테 등을 배출한 도시가 피렌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피렌체는 모름지기 <냉정과 열정 사이>의 마지막 약속의 땅이었다. 남녀 작가 두 명이 남녀 주인공 관점에서 매일 한 장씩 교대로 썼다는 일본 베스트 셀러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며 늘 미완의 여지를 남기는 일본 소설은 내겐 결코 선호 대상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소설을 접하기 전까지는…. 그러나 마치 면도날에 베인 상처처럼 가늘고 예리한 통증을 느껴지게 했던 이 소설은 오랜 뒷통증까지 동반하며 긴 여운으로 남았다. 그로 말미암아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밀라노와 피렌체는 쓸데없이 긴 시간 마음 속에서 더 낭만적인 모습으로 포장되고 있었다.

무리를 했다. 소설의 마지막 배경이자, 두 남녀 주인공의 재회 장소였던 두오모(센트럴 성당)의 꾸뽈라(꼭대기 전망대)를 향했다. 골프를 위한 체력 안배를 핑계로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은 가급적 지양해온 나였지만 464개의 좁은 계단을 굽이돌며 헉헉대고 올랐다. 고소공포증으로 고층에선 창밖도 내다보지 못하는 주제에 굳이 꾸뽈라에 올라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엉거주춤 섰다. 내려다보이는 피렌체의 모습은 아담하면서도 고풍스러웠다. 하지만 꾸볼라는 내가 상상하던 그림이 아니었다. 쥰세이와 아오이가 마지막에 재회했던 그 곳은 소설처럼 여유있고 극적으로 만나질 공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좁고 긴 계단을 올라 드디어 두더지 구멍으로 머리를 쏙 내미는 즉시 꾸뽈라에 올라와 있는 모든 사람들을 홀랑 만나버릴 수밖에 없는 협소한 공간이었다. 만약 아오이가 나처럼 고소공포증이라고 있었다면 상황은 더 비관적이다. 군데군데 철망으로 엮인 바닥 아래로 수 십 미터 까마득한 아래 풍경들이 그대로 내려다보여 후들거리는 다리로는 반듯하게 서 있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두더지 구멍으로 나오던 쥰세이가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허리를 구부린 어정쩡한 자세의 아오이를 발견했다면 다시 구멍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함께 계단을 오르던 육중한 체구의 아저씨가 결국 꾸뽈라 꼭대기에서 호흡 곤란으로 쓰러져 모든 이들이 한동안 공포에 떨어야 했다. 119까지 출동하였으나 아저씨를 옮길 방법이 없었다. 빙글빙글 좁은 나선형의 계단으로는 들것이 내려갈 수 없었고 아저씨를 들쳐업고 내려갈 수 있는 공간도 확보되지 않았다. 결국 아저씨는 현장에서 응급처치로 호흡을 살린 후 몸소 464개의 계단을 걸어 내려가 응급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현실 속의 피렌체 두오모 꾸뽈라는 상상 속의 꾸뽈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소설의 힘은 대단했다. 꾸뽈라는 연인들이 남겨놓은 사랑 서약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냉정과 열정 사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감정 지점에 서 있는 부부에겐 흔한 사랑의 서약 한 줄 남기는 것도 고된 노역인지라 낙서금지 팻말에 고마움을 표시하며 하산에 임했다. 어차피 우린 사랑의 서약 보다는 스코어카드 기입에 더 관심이 많은 부부가 아니던가?

피렌체 시가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Ugolino GC는 이탈리아의 골프 역사가 시작된 골프장이다. 이곳은 1889년 피렌체가 영국의 통치하에 있을 때 이탈리아 최초의 골프장으로 문을 열었다. 이탈리아의 골프장들은 정부 주도 하에 육성된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1920~30년 대에 관광부에서는 골프가 관광객 유치에 지대한 공헌을 할 것이라는 관측 하에 골프장 건설을 장려했고, 이때 표본으로 제시되었던 골프장이 바로 Ugolino GC이라고 한다.

클럽하우스는 피렌체 두오모에서 내려다 보이던 예의 그 적갈색 지붕과 베이지톤의 외벽을 한 전형적인 중세 색감을 지니고 있었다. 코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양한 수종의 나무였다. 버섯 모양의 소나무,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은 사이프러스 나무, 뽀얀 먼지가 내려앉은 듯 탁한 녹색의 올리브 나무 등 다른 곳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신기한 모양의 나무들이 코스를 채우고 있었다. 골프장이 현재의 터로 옮겨지고 새로운 레이아웃을 잡은 것이 1934년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코스는 무지 짧았다. 불과 5,741m, 드디어 우리에게 베스트 스코어 갱신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전반 세 홀 정도 코스를 경험하면서 우리의 꿈은 현실이 되는 듯 했다. 비교적 짧고 편안한 파 4홀들이 이어졌고 일찌감치 버디를 하나씩 잡아들고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그러나 4 번째 홀부터 코스가 반격을 시작하더니 핸디캡 1번인 5번 홀부터 본격적으로 공격을 해왔다. 5번 홀, 400m 파 4에서 드라이버 OB로 시작한 경기가 제대로 풀릴 리 없었다. 결국 스코어카드에 양파의 불명예를 남기며 고전은 시작 되었다. 코스는 우리를 다방면으로 시험에 들게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업다운이 심한 것도 모자라 페어웨이 안으로 나무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며 방해 공작을 펼쳐왔다. 후반에는 유난히 OB가 많았고 고도가 다른 언덕들이 등 장하며 거리 계산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린도 유난히 작았고 라이도 읽기 힘들었다. 결국 골프는 결코 거리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고 베스트 갱신을 향한 열정은 냉정하게 식어버렸다.

그러나 라운드를 마치고 테라스에서 내려다보이는 코스는 정말 아름다웠다. 웨이터를 통해 골프장이 위치하고 있는 일대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 산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녁 햇살이 길게 내리 꽂힌 코스를 내려보며 홀짝홀짝 들이킨 시원한 화이트 와인 한 잔. 세상의 모든 와인을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단 두 가지 종류로 밖에 구분하지 못하는 절대미맹의 혀에도 뭔가 남다르게 착착 달라붙는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인이었다.

피렌체 Ugolino GC는 페어웨이에 올리브 나무를 처음으로 등장시키며 우리가 지중해에 돌입했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동안 막연한 낭만의 모티브였던 올리브 나무는 생각보다 키도 작았고 탁한 녹색을 띄어 골프장의 청량감을 저하시키는 존재였다. 그리고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가 잔디에는 적합치 않다는 새로운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이는 지중해로 더 근접하는 여정을 가지고 있던 우리에게, 코발트 바다를 끼고 있는 씨사이드 코스를 꿈꾸던 우리에게 크나큰 비극이었다. 피렌체는 이래저래 꿈과 현실이 너무 먼 곳에 있음을 실감시켜 주었다.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