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물고기 장식의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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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85년 7월 일본 나라 (奈良) 현 후지노키 (藤ノ木)에서 한 고분 (古墳)에 대한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부근에 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훼손이 심해지자 발굴에 착수한 것이다.

문제의 고분은 지름 48m.높이 9m의 대형 원분 (圓墳) 으로 조성시기는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그해 12월까지 진행된 1차조사에서 석실 (石室) 내부에서 유물 수천점이 출토되고 석관 (石棺) 이 발견됐다.

일본 고고학계는 이집트 투탕카멘왕묘 (王墓) 발굴에 버금간다고 흥분했다.

이상하게도 석실은 백제 묘제 (墓制) 인 횡혈식 (橫穴式) 이면서 석관은 일본식 가형 (家形) 석관이었다.

또 마구 (馬具).무기.토기는 중국.사라센의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국제색 짙은 문화를 향유했던 피장자 (被葬者)가 누구일까에 관심이 집중됐다.

우선 천황은 아니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당시 천황 묘는 전방후원 (前方後圓)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학자들은 천황은 아니지만 천황과 맞먹는 세력가라고 추측했다.

열쇠는 석관에 있었다.

개봉에 앞서 파이버스코프를 사용한 내부상태 점검을 거쳐 88년 10월 뚜껑을 열었다.

석관속으로부터 금동관.도검.허리띠.귀걸이.금동신발.동경 (銅鏡) 등 과거 일본 고분에서 볼 수 없던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본학자들은 도래인 (渡來人) 설과 호족 (豪族) 설 둘로 갈렸다.

대세는 도래인쪽이었다.

도래인설의 유력한 근거는 금동신발과 금동관. 이중 금동신발은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흡사했다.

특히 바닥에 붙은 보요 (步搖) 장식과 귀갑문 (龜甲文) 은 중국.일본에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도래인설은 다시 백제계 소가 (蘇我) 씨냐 아니면 신라계 모노노베 (物部) 씨냐로 갈렸다.

소가씨는 6세기 전반이래 1세기동안 정권을 잡을 만큼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지난 96년 전남 나주시 복암리 3호 고분 석실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신발이 2년간 복원작업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발 바닥에 귀갑문이 새겨져 있고 물고기장식 5개가 매달려 있음이 확인됐다.

후지노키 금동신발엔 물고기장식이 있으나 무령왕릉 금동신발엔 물고기장식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공주→나주→일본 나라로 이어지는 고대 문화전파 루트를 상정해본다.

녹슨 유물 한점이 1천4백년전 고대 한.일 문화교류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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