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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사랑에게, 네가 있어 행복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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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호 04면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그것도 뻔한. 첫 만남은 티격태격 시작됐다. 처음엔 그저 그런 상대였는데 언제부턴가 호감이 생겼다. 조심스럽게 관심을 표현하게 됐고 수줍음을 타는 일도 많아졌다. 드디어 사랑이라 느꼈을 때 그 사랑을 인정하고 고백하기까지 한참 용기를 내야 했다. ‘교과서’적으로 흐르는 감정의 변화다.

이렇게 뻔한 얘기를 특별하게 만든 건 주인공들의 나이다. 40대 후반. 설레는 사랑과는 한발 비켜서 있으리라, 넘겨짚기 쉬운 나이. 하지만 사랑의 설렘은 나이를 타지 않았다. 누가 중년의 사랑을 쓸쓸하다 했는가. 언제 하는 사랑이든, 사랑은 늘 따뜻했다.

‘주연 윤석화’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관심을 끈 연극이다. 2007년 학력 위조 파문 이후 첫 주연작. 부담과 기대가 뒤섞인 무대였다. 관객들은 배우 윤석화의 재기를 지지해 줬다. 5월 27일부터 한 달 예정으로 시작된 연극이 관객들의 호응에 이달 말까지 연장됐을 정도다.

작품은 러시아 드라마계의 거목 알렉세이 아르부조프의 1975년 작(원제 ‘오래된 코미디’)이다. 혁명과 전쟁을 겪으면서 제각각 마음의 상처를 지닌 두 중년 남녀가 우연히 요양원에서 만나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사랑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서정적으로 그렸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 삶은 ‘소설 한 권’이다. 더욱이 전시(戰時)였다.
의사 로디온(최민건)은 동료를 잃었고, 아내를 잃었다. 전직 배우 리다(윤석화)도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배신당했다. 하지만 그 가슴 저미는 고통의 시간도 흘러갔다. 상처는 아물었다. 대신 지독한 외로움이 흉터로 남았다.

두 사람은 조심스레 마음의 빗장을 열고 서로에게 다가간다. 서로에게 상처를 열어 보이고 웃기 시작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고, 춤을 추면서 행복을 느꼈다. ‘함께하는 것’의 행복이다.

연극은 남녀 주인공 두 명의 대화로만 진행된다. 하지만 섬세한 무대장치가 지루함을 잊게 했다. 바닷가 언덕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고, 비 오는 날 장면에선 실제로 세찬 물줄기가 무대 위로 쏟아졌다.

장면장면에 맞춰 달라지는 리다의 옷과 신발도 보는 재미를 더한다. 디자이너 진태옥ㆍ박항치ㆍ박동준ㆍ강희숙 등이 의상협찬을 했다. 주인공 두 사람의 사랑이 한 겹 두 겹 쌓여 갈수록 객석을 채운 중장년층 관객들의 감성도 함께 깨어난다. 인생의 절정이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때론 예상치 못한 사랑을 만나 삶이 다시 시작되기도 하는 법 아니냔 깨달음이다. 리다는 “지금까지 내 인생은 당신을 만나기 위해 오는 중이었다”고 고백한다. ‘당신’이 있어 상처투성이 ‘내 인생’도 가치 있는 길이 된 것이다. 사랑은 실로 놀랍고 아름다운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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