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보이지 않는 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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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호 35면

22일 오전 11시 전후로 두 시간 동안 일식 현상이라는 우주쇼가 벌어졌다. 달이 해를 가려 대낮인데도 날이 어스름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해가 서쪽으로 지면서 어두워지는 것에 익숙한데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에 어두운 분위기가 연출되니 묘한 느낌이 드는 상황이었다. 수은주가 한참 올라가야 할 여름날 오전 시간에, 일식과 함께 기온도 2~4도 정도 내려갔다고 한다.

태양은 지구에 빛과 에너지를 제공한다. 에너지 없이 살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지구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에너지는 태양에너지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태양이 어떻게 빛을 내는지 궁금해했다.

그 질문의 답을 한스 베테(Hans Bethe)라는 핵물리학자가 찾아냈다. 초기의 별은 주로 수소로 구성돼 있다. 별 내부에서 수소 네 개가 핵융합을 해 헬륨이 될 때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낸다. 이를 밝힌 공로로 그는 196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그는 69년 한국을 방문했다). 멀리 떨어진 태양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는 책상에서 연필과 종이로 밝혀냈다.

그 후 과학자들에게는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헬륨은 또다시 핵융합을 해 점점 더 무거운 원소로 바뀌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헬륨 두 개가 모이면 베릴륨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떤 이유 때문에 그 과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헬륨 세 개가 모여 하나의 탄소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 단 탄소의 양자상태가 어떤 특별한 상태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여기서 양자상태란 탄소 핵과 같은 미시세계 물질이 존재할 수 있는 제한된 몇 가지 상태를 의미한다). 놀랍게도 탄소는 인간이 추측한 이 양자상태를 갖고 있어 세 개의 헬륨이 탄소로 융합되는 게 가능했다. 이 과정을 밝힌 윌리엄 파울러(William A Fowler)는 8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로써 별 내부에서 수소가 헬륨을 거쳐 탄소·산소 등 점점 무거운 원소로 바뀌는 과정이 규명됐다. 헬륨부터 철까지의 원소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탄소 핵의 이 특별한 양자상태는 지극히 짧은 찰나의 순간 동안만 존재하지만 그 상태가 존재함으로 인해 탄소가 만들어졌고, 탄소가 있음으로 인해 유기물질이 생성돼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생명체의 탄생 과정은 아직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의 영역이지만 그 과정 중에 결정적인 단계로 탄소의 양자상태가 있는 것이다.

자연에는 빛의 속도와 같은 여러 가지 상수가 있다. 그런 상수 값과 자연 법칙들이 양자상태를 결정하는데, 그 양자상태가 만약 다른 상태에 있었다면 우주와 자연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됐을 것이다. 우주의 대부분은 수소와 헬륨 등 가벼운 원소로만 돼 있고 탄소·산소·유기물질·고체도 없는 상태였을 것이다.

물론 지구나 생명체도 없게 된다. 이처럼 자연법칙들은 의외로 생명 현상까지 지배한다. 심장 박동, 단백질의 구조 등등 생명 현상 속에도 물리법칙들이 들어 있다.

자연이 왜 하필 이런 모양인가, 나는 왜 이런 모습인가 하는 것도 자연법칙에 따른 것이다. 자연과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자연이 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됐는가 하는 것이다.

그 질문의 답은 일상생활과 무관해 보이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자연의 손이 우리 몸을 지배하고 뇌에서 이뤄지는 생각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새로운 과학지식은 기존의 사고를 뛰어넘게 함을 우리는 경험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동설을 뒤엎었고,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과 철학을 바꾸었고, 양자역학은 불확정성의 세계관을 제시했다.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자연을 이해하는 게 필요한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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