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공기업 한전의 새로운 인사 실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지난달 22일 오후 3시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12층 사무실. 시계를 들여다 본 인사관리팀 김유상 차장이 한 대의 컴퓨터에만 설치된 특별 소프트웨어를 작동시켰다. 서울 본사와 지방 본부의 차장 이상 간부 4500명 중에서 무작위로 승진 심사위원을 고르는 프로그램이었다. 이튿날 오전 6시부터 이뤄질 심사를 15시간 앞두고 심사위원 선정에 들어간 것이다.

심사위원 정원은 모두 90명. 정원의 4배인 360명의 이름과 소속·직급 등을 추렸다. 그리고 90명씩 명단을 정리해 봉투 네 개에 담아 사장실로 넘겼다.

오후 10시쯤 한 개의 봉투가 권태호 인사관리팀장에게 전달됐다. 김쌍수 사장이 네 개의 봉투 중에서 뽑은 것이었다. 봉투를 연 권 팀장은 우선 30명에게 연락해 다음 날인 23일 오전 6시까지 서울 공릉동 켑코(Kepco) 아카데미(한전 연수원)로 오라고 했다. 이들은 처·실장 승진 후보자를 심사할 위원으로 선정된 것이다. 물론 이들에게는 심사위원이 됐다는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지시도 내렸다.

연락은 권 팀장 혼자서 맡았다. ‘완벽한 보안’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청탁 인사와 ‘연줄’에 따른 인사를 없애려는 시도는 이렇게 철저했다.

심사위원들은 공릉동 아카데미 현관에서 휴대전화를 내놔야 했다. 외부와 일절 연락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 설명’도 들어야 했다. 심사위원끼리 얘기를 나누는 것도 금지됐다. 혹시 승진 대상자와 친한 심사위원이 다른 위원에게 부탁을 할까봐서였다.

심사위원들은 독방에서 오후 6시까지 컴퓨터를 통해 인사 자료를 들여다 보며 승진 대상자들을 평가했다. 식사는 방으로 배달됐다. 방에서 나와 화장실에 갈 때도 감시 요원이 따라붙어 다른 심사위원과 만나지 못하게 했다. 이런 절차를 거쳐 처·실장 승진 대상자 131명 중 55명을 가려냈다.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부산 남부건설처 이재효 차장은 “분위기가 워낙 삼엄해 공정한 심사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고 말했다. 그는 “심사위원들을 철저히 떼어 놓는 바람에 오후 6시 심사가 끝난 뒤에야 위원들끼리 얼굴을 보고 누가 참여했는지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직원은 “과거처럼 심사위원이 누군지 미리 알고 청탁을 하는 관행은 발붙일 곳이 없게 됐다”고 말했다.

24일과 25일에는 같은 방법으로 부장 승진 후보자를 대상으로 심사를 했고, 26일에는 전체 승진자가 발표됐다.

한전이 이처럼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 출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철저한 보안 속에서 승진 심사를 한 것은 처음이다. 청탁을 배격하고 철저히 능력과 성과 위주로 인사를 하겠다는 김쌍수 사장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이 같은 ‘인사 쇄신’은 김 사장이 공기업 개혁 중에서도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심사 관계자는 “승진 명단이 발표되자 불만을 표시한 직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년에 비해 불만의 강도가 낮았고, 심사를 수긍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김남식 차장은 “승진 심사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전해지면서 직원들 사이에서 능력을 키우고 업적을 쌓아야겠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고 전했다.

권혁주 기자

◆한국전력=대표적인 공기업이다. 1904년 한성전기가 전신이며, 2001년에 한국수력원자력 등 발전 6개 회사를 자회사로 분리했다. 2008년 기준으로 직원 수는 2만970명이고, 매출은 31조5000억원에 달한다. 3조6600억원의 영업 적자를 냈다. 지난해 8월 김쌍수 사장이 취임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