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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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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 7월 16일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최한 국제워크숍에서 나는 체코의 한국학자 이바나 그루베로바의 지정토론을 맡았다. '한국한시선집'의 체코어 번역 출간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한국의 가파르고 바위 많은 산과 긴 겨울을 지나 피는 첫 봄꽃, 가을에 붉게 타는 단풍을 못 봤더라면 한국 사람들이 산에 집착하고, 한국 시에 꽃과 단풍의 이미지가 너무 많이 나온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한국 사람들과 대화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는 한국 시에서 묘사되는 감정이 가짜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튿날 우연히 나는 동유럽 여행을 위해 체코 프라하 공항에 내렸다. 11시간의 비행 끝에 다시 몇 시간을 버스로 이동하면서 내가 본 것은 완만한 구릉의 끝없는 황금들판, 지평선 너머로 소실되는 목초지, 사람의 발길을 완강히 거부하는 원시의 삼림뿐이었다. 사람이 걸을 길도 나 있지 않은 수만, 수십만평의 밀밭과 옥수수밭을 지나면서 나는 전날 들은 이바나의 이야기가 계속 생각났다.

직접 와보니 왜 한국 시인들이 그토록 산에 집착하고 계절의 변화에 예민했는지 충분히 알겠다던 그녀의 말을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안 와봤더라면 그들의 감정이 도무지 허위와 과장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 오해를 나도 오해할 뻔했다.

문화는 기후와 풍토에서 나온다는 말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그 땅의 기후와 풍토를 모르고서 어떻게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밀밭을 보고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의 금발을 떠올리고, 장독대에 소복소복 쌓인 흰 눈에서 허기진 소년은 고봉밥 생각에 입맛을 다셨다. 풍토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면 사람도 생각도 같을 수가 없다.

1999년 대만 정치대학교에 교환교수로 가 있을 때의 일이다. 겨울이 왔는데도 주변을 에워싼 짙은 녹음은 조금도 사위어지지 않았다. 한국어 작문시간이었다. 김용택 시인의 '눈 오는 집의 하루'란 시를 읽어줬다. "아침밥 먹고 또 밥 먹는다/ 문 열고 마루에 나가/ 숟가락 들고 서서/ 눈 위에 눈이 오는 눈을 보다가/ 방에 들어와/ 또/ 밥 먹는다."

소감을 물었다. "참 심심한 사람이에요"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생전 눈이라곤 직접 본 일이 없는 학생들, 그들에게 앞산과 마을이 내다보이는 시골집 마루에서 숟가락을 들고 서서 온종일 흰 눈이 내려 대지 위에 포근하게 이불을 덮어주는 광경을 어찌 이해시킬 수 있을까 싶어 참 난감했다.

다른 문화의 이해에는 풍토의 차이에 따른 눈금 조정의 어려움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소리는 이념도 풍토도 훌쩍 뛰어넘는다. 문학과 예술은 모든 장벽을 단숨에 가로질러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 가교를 놓아 준다. 여행 둘째날 폴란드 아우슈비츠로 가는 버스에서 영화 피아니스트를 봤다. 급작스레 들이닥친 게슈타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우는 제 아이의 입을 막아 질식사시킨 엄마가 실성한 채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만 되뇌는 장면이 나왔다. 나는 여기서 김종삼의 시 '민간인'에 나오는, 황해도 용당포 앞바다에서 우는 아이를 물속에 수장시킨 그 실성한 어미의 호곡 소리를 겹쳐 들었다.

이미 '한국선시(禪詩)선집'과 만해의 '님의 침묵'을 체코어로 번역 출간한 바 있는 이바나에게 청중 한 사람이 물었다. "그 어려운 선시가 이해되던가요? 한문 원문을 직접 보고 했습니까?" 그녀가 대답했다. "인도에서 비롯된 부처님의 가르침은 만인의 마음을 끕니다. 위대한 정신이 주는 감동은 소통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시 한 수를 번역할 때마다 즐겁고 멋진 경치를 보는 느낌이 들었고 정신이 아주 맑아졌습니다. 체코 사람들도 제 느낌을 다 알아듣고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이날 토론에 이은 동유럽 여행에서 나는 크게 한 수 배웠다.

정 민 한양대 교수.국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