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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가 있는 아침 ] - '세한도(歲寒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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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홍섭(1965~ ) '세한도(歲寒圖)' 전문

당나귀 타고
달리는 차도를 지나
창 많은 문우(文友) 집들도 지나
소나무, 잣나무 네 그루 서 있는 집을 찾아가다

때는 여름인데
여기는 벌써 겨울이고
여름나무들은 방자히 푸른데
이 집의 송백(松柏)은 흰 눈 속에 푸르다

집이 한 채밖에 없으니
주인은 귀양 온지 알겠고
창이 하나밖에 없으니
오래 외로웠음을 알겠다

돌아나오려 하나
당나귀는 자꾸만 뒷발로 버티고
흰 눈은 무량무량 왔던 길을 지운다



한 편의 시는 시인이 세상을 향해 낸 작은 창문과 같다.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 이 외롭고 아름다운 집에는 차를 타고 못 간다. 당나귀 등에 올라타고 어슬렁어슬렁, 그게 시를 찾아가는 데는 제격이다. 세한도(歲寒圖) 속의 적막한 집을 한 채씩 품고 사는 시인들이여, 세상은 무성한 여름인데 그대의 소나무.잣나무 위에는 흰 눈이 얹혀 있구나.

나희덕<시인>.끝

나희덕 시인의 연재는 오늘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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