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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실리콘 밸리와 고시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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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 스탠퍼드대 옆에는 실리콘 밸리가 있고 서울대 옆에는 고시촌이 있다는 자조적인 비유가 있다.

미국의 명문대학 졸업생들이 대학에서 갈고 닦은 지식과 기술을 첨단기술 현장에 접목하고 있을 때, 우리의 엘리트 대학졸업생들은 고시촌에서 전공과는 관계없는 시험 준비에 매달리고 있다.

공대 졸업생들도 판.검사가 되겠다고 고시촌에 들어온다고 하는데, 다가오는 21세기를 짊어져야 할 많은 고급인력들이 대학에서 연마한 지식이나 전공과 동떨어진 고시준비에 몰두함으로써 대학의 인재양성 기능을 무색하게 하고 있으며 엘리트 교육이 거꾸로 가고 있는 실정이다.

춘향이 애인 이도령이 과거에 급제해 하루아침에 신분이 달라진 암행어사가 돼 한풀이하는 춘향전의 테마에 우리들은 어릴 적부터 익숙해져 있다.

이런 과거제도의 신화가 지금까지 사법.행정고시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고시제도는 돈 없고 연줄도 없는 실력 있는 엘리트를 발굴해 정부의 고급관료로 등용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고 또 이렇게 선발된 엘리트 관료들이 국가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육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고 대학에서도 필요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가난해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이런 시대에는 고시를 가장 이상적인 인재등용제도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세상이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짜여진 교수진을 가지고 제대로 교육을 하고 있으며 많은 장학금 기회가 주어져 돈이 없어도 대학에 진학해 공부할 수 있게 됐다.

연간 약 19만명의 대학졸업생이 배출되고 있으며 미국 어느 대학을 가나 1백명 이상의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는 고시제도가 없어도 적재적소에 맞는 제대로 교육받은 인재를 쉽게 선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또 다른 수만명의 학생들이 고시촌에서 몇년씩 사교육을 하면서 소중한 시간과 정력, 그리고 돈을 투자해야 되는지, 그리고 왜 정부는 이와 같은 엄청난 국력의 낭비를 조장하고 있는 것인지…이제 정말 진지하게 짚어볼 때가 된 것 같다.

YS정권에서 사법고시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하고 공론에 부친적이 있었다. 그러나 법조계의 심한 반발로 무산돼 버렸고 그 이후 지금까지 아무도 재론을 못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기승을 부리는 고시신드롬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심각한 마지노선까지 다다른 감이 든다. 미국 유학에서 어렵게 학위를 따와도 반겨주는 직장이 없고 대학 시간강사 자리도 얻기 어려운 실정이다.

기업과 은행은 오래전부터 매력없는 직장이 돼 버렸고 요즘에는 그나마도 취직할 길이 막혀 버렸다.

그러나 공직사회는 어떤가.

일단 발을 들여 놓으면 가장 안정적인 직장이 일생 보장되고 능력이 있으면 탄탄대로 출세길이 열린다.

그리고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되면 하루 아침에 신분격상이 되니 고시신드롬이 없을 수 없는 사회가 돼 버렸다.

21세기의 사회는 지식사회다.

세계무대에서 우리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정부부문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 각 부문이 창의성과 전문성을 갖춘 우수한 인재들로 무장돼야 한다.

우수한 고급두뇌들이 모두 정부부문으로 몰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 뿐더러, 전공과는 무관한 고시준비를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다.

더욱이 고시에 의한 폐쇄적인 공무원 임용방식은 새로운 지식사회가 요구하는 다양한 전문인력을 발굴하고 키워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과거와는 달리 경제.사회환경이 급변하고 국내와 해외에서 우수한 인력이 끊임없이 배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현행 고시제도는 인재등용 수단으로서의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우수한 인력이 고시에 집중되면서 발생하는 병폐를 막고 21세기 지식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공무원 임용제도를 대폭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시제도에 의한 획일적이고 폐쇄적인 임용제도 대신 민간기업과 같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하급공무원에서 고급공무원까지 새로운 임용제도를 개발해야 할 것으로 본다.

최근 정부에서 3급이상 공무원에 대해 연봉제와 계약제를 도입한다는 계획이 입안되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차제에 공무원 임용제도의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해 공무원 임용제도가 21세기 고급인력 수급계획에 저해가 될 수 있는 독소관행을 근절해야 할 것이다.

이선(산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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