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새로운 한일관계의 조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다음달 7일로 예정된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일본 방문은 한.일 양국의 특수관계에 비추어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재의 한.일관계는 냉전의 절정시점인 1965년에 맺어진 한일조약에 근거한 것이다.

65년 조약에 기초한 한.일관계는 소련.중국.북한으로 이어지는 공산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아시아의 정치.경제.안보 협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한.미.일 3국의 지역통합 전략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냉전시대의 산물로서 완전한 관계회복일 수는 없었다.

냉전해체, 세계화의 전면적 도래, 동아시아 경제위기라는 세기적 격변을 맞아 지금 한.일관계는 전혀 새로운 파트너십을 형성해야 할 시점을 맞게 됐다.

우리는 어떤 점에서 65년 관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한.일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

민주화와 평화, 인권을 위해 투쟁해 온 金대통령이 갖는 아시아 지도자로서의 상징성, 그리고 국민들이 밑으로부터 이루어낸 민주화와 더불어 지금 한국은 인권과 민주주의.평화와 지역협력의 이니셔티브를 가지고 역내 (域內) 중심국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

특별히 식민통치와 민족분단, 전쟁으로 고통받은 한국에서 인권과 민주주의.역내협력.평화운동이 먼저 시작되는 것은 커다란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역사적 피해자의 위치를 초극 (超克) 하는 포용과 상생 (相生) , 도덕적 자기확신으로 나아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다음 세기 동아시아 갈등을 능동적으로 조정할 역내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으로부터 발원 (發源) 한 평화주의가 아시아로 확산되고, 아시아의 평화노력은 다시 21세기 세계의 평화구축을 위해 나아가는 연쇄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최근 북한 문제에 있어 일본의 지나친 군사적 대응태도나 북한 배제전략은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는 물론 동아시아 협력과 평화를 구축하는데 기여하기 어려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한.일관계는 매우 경직된 경성 (硬性) 관계를 계속해 왔다.

새로운 한.일관계의 수립은 지금까지의 국가 일변도의 접근을 넘어 국가와 시민사회 두 수준에서 접근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두 나라 시민사회간에 연성 (軟性) 관계의 증진은 국가의 경성관계를 크게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국가 수준에서 양국관계는 과거사 처리로 인해 정치.경제.군사 등 여러 영역에서 상호의존적인 선린관계로 발전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는 동안 시민사회 수준에서의 관계는 학자.문화예술인.시민사회단체 및 각종 비정부기구 (NGO) ,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의 활동과 교류를 활성화시키면서 광범하고도 빠르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며 또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하는 시민사회는 더디게 발전하는 국가 수준에서의 관계에 커다란 압력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 한.일 양국간의 관계는 이제 폐쇄적 국가주의를 넘어 인권과 민주주의, 인간화와 복지화, 평화와 연대, 번영과 쾌적한 환경을 위한 노력이라는 보편적 이상과 가치를 추구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한.일관계 역시 다른 국가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특수한 관계' 와 '일반적 관계' 를 모두 포함한다는 인식과 함께 이제 전자 (前者) 보다는 후자 (後者) 를 발전시키려는 인식지평의 확대가 필요하다.

이성과 합리주의에 기초, 상대 국가의 특정측면을 과도하게 일반화하려는 경향을 극복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도 관계개선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일본측에서는 과거사 처리문제가 단지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서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그 나라 시민의식 수준과 내일의 발전방향을 측정하는 척도라는 점, 또한 자기를 향한 도덕적 성찰일 뿐만 아니라 이웃을 향한 연대의 천명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정신대 (挺身隊) 문제를 우리가 중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무엇보다 인권과 문명, 휴머니즘에 대한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한.일관계의 기본원리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수준 모두에서 보편적 가치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최장집(고려대 교수.정책기획위원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