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찬씨 첫 장편 '세상의 저녁'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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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사랑은 슬픔이다.

이 소설은 지독하게 슬픈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물마다 몸속에 깊은 상처를 하나씩 숨기고 사는 탓에서다.

그들의 슬픔은 끝이 없다.

인간의 마음으론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작가는 사랑의 슬픔만 얘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 슬픔을 모티브로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신 (神) 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한 '무엇' 을 던지고 싶은 것이다.

중견작가 정찬 (44) 씨가 첫 장편 '세상의 저녁' 을 펴냈다 (문학동네刊) .신이 침묵하고 있는 세계의 포악성과 희생을 통한 구원이란 무거운 주제를 추구해 왔던 그가 이번에는 '사랑' 이란 새 줄기를 타오르며 신의 본질을 찾아나선다.

83년 중편 '말의 탑' 으로 등단해 95년에는 동인문학상을 받으며 중견작가의

대열에 선 그가 15년만에 내놓은 장편을 통해 '사랑의 슬픔' 과 '신의 본질' 이란 두 마리 토끼를 향해 내달음질 치고 있는 것. 주인공 황인후는 카톨릭 신부의 사생아라는 이력을 가진 간질병 환자다.

별장에 칩거하며 살던 그는 강혜경이라는 여자를 알게 되고 그 만남은 그녀에게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기억' 을 되살리는 계기가 된다.

그에 대한 혜경의 연민은 사랑이 되고 그들은 부부가 된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심장기형으로 죽는다.

아이를 구해달라고 눈물의 기도를 했던 인후는 그 충격으로 수도원으로 잠적하고 그 후 신에 대한 원망으로 거의 걸인처럼 지낸다.

그러나 신에 대한 증오는 자신의 기도로 아이를 살리겠다는 교만에서 비롯됐음을 깨닫는 인후는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이 속죄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낮은 곳에서 사랑을 실천하던 인후는 한 병든 노인을 보살피다 눈 쌓인 거리에서 눈을 감는다.

이런 기둥 줄거리 위에 인후를 낳은 빈첸시오 신부와 갈등, 신부가 되기 위한 인후의 갈등, 인후의 희생을 목격하는 동료신부 등이 개입하면서 이야기는 풍요로움을 얻는다.

그러면서 작가는 주인공 인후를 통해 신과 인간, 선과 악, 기적과 구원 등과 연관된 문제을 진지하게 탐사해 나가게 한다.

이문열씨의 출세작 '사람의 아들' 과 같이 인간의 본질과 종교적 문제를 물으며 신과 인간의 접점을 찾는 깊이를 지닌 작품이 '세상의 저녁' 이다.

이런 무겁고도 깊은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이 소설을 아름답게 비춰주는 것은 강혜경의 지순한 사랑이다.

불우한 처지의 주인공을 사랑해 한 몸이 되고 그의 아이까지 낳은 혜경. 약혼자와 부유한 가정을 모두 버리고 인후의 발작까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 여인.

그녀의 격렬한 사랑의 행위는 비록 세속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희생과 속죄가 바탕되고 있기에 성 (聖) 과 속 (俗) 의 분간을 없애버린 '완전한 사랑' 일 수 있다.

"작가에게 궁극은 시간의 무게를 견디는 소설" 이라는 정씨가 이 세기말을 넘어 시대와 세태의 풍상을 견디며 인간성의 위엄을 드러낼 '작품' 으로 이 장편을 던진 것이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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