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북한식 强盛大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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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기원전 800년께 그리스는 폴리스라고 불리는 도시국가시대를 맞았다.

1백50개에 달했던 이들 폴리스 중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양웅 (兩雄) 으로서 패권경쟁을 벌였다.

상공업이 발달한 아테네는 해외에 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해양국가였다.

기원전 6세기 솔론과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통해 데모크라티아, 즉 민주정치체제를 확립했다.

그후 페르시아전쟁을 거쳐 그리스 전체의 패권국가로 등장했으며, 기원전 5세기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를 맞았다.

우리가 '그리스문화' 라고 부르는 찬란한 문화가 꽃핀 것이 이때다.

스파르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정복자인 소수의 스파르타인과 다수의 선주민들로 구분된 엄격한 계급사회였다.

그 때문에 민주정치체제를 가진 폴리스들을 적으로 간주했다.

소수가 다수를 강압으로 다스리자니 군사력이 필요했고, 이로부터 군무 (軍務) 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상무 (尙武) 의 전통이 확립됐다.

건강하게태어난 남자 어린이는 7세가 되면 집을 떠나 공동생활을 하면서 전사 (戰士) 로서 교육받았다.

20세부터 병역이 시작되고 60세까지 현역 군인으로 종사했다.

학습은 소년시절 기본적인 읽기.쓰기를 배울 뿐 독서나 토론에 열중하는 것은 환영받지 못했다.

스파르타인의 미덕은 용맹.복종.애국심이 전부였다.

스파르타의군사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페르시아전쟁 중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 전사한 3백명 스파르타 전사들 얘기는 유명하다.

당시 그리스에서 정예부대라면 바로 스파르타 보병을 의미했다.

스파르타는 이처럼 막강한 군사력으로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아테네를 꺾고 패권을 차지했다.

하지만 스파르타가 역사에 남긴 것은 전쟁외엔 없다.

철학.과학.문학.역사.건축.미술 그 어느 것도 남기지 못했다.

어렵게 잡은 패권도 불과 30년동안 지속했을 뿐이다.

역사가들은 스파르타가 역사에 남긴 것이라곤 강압적 교육방식을 가리키는 '스파르타식' 이란 용어뿐이라고 비꼰다.

북한은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강성대국 건설' 이란 호전적인 구호를 들고 나왔다.

세계를 놀라게 한 로켓발사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그러나 로켓을 만드는 기술.돈은 있으면서 외국에 식량원조를 구하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훗날 역사가들이 북한이란 나라가 역사에 남긴 것은 '북한식' 이란 용어뿐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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