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그들이 봉환을 남기고 경상북도 봉화로 출발한 것은 그로부터 닷새 뒤였다.

고집을 부리던 봉환은 나중에 합류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와 행동을 같이하려 했던 태호도 철규를 따라나섰다.

영월 덕포장까지 내려가서 또 다시 남으로 내려가는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가 보면, 고씨동굴 앞을 지나 각동리에서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동쪽으로 물러앉은 하동면을 거쳐 줄곧 달려가면 봉화의 춘양면과 만난다.

그 지방도로의 끝은 31번 국도와 만나게 되어 있는데, 꼬불꼬불한 산협길이 하루 내내 이어지기 때문에 그들이 들러볼 작정이었던 재산장터에 당도했을 때는 오후 3시 무렵이었다.

경상도에 도착해서 처음 만나는 오일장터였다.

일행은 철규와 변씨 그리고 태호와 승희였다.

운전석 좌석이 비좁았기 때문에 철규의 자리는 덮개를 씌운 짐짝 속에 마련했다.

장짐은 모두 용대리에서 가져온 황태와 반건조 오징어였다.

재산장터에 당도한 그들은 한동안 말을 잃어버렸다.

장터도 있었고 마침 장날이기도 하였지만, 장날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보통 산협 고장에 있는 장터에 장꾼이 없어 한산하기 짝이 없을 경우, 두 사람이 싸우면 만류할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재산장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파장 무렵에 당도한 까닭도 있었지만, 장터에는 딱 두 사람의 난전꾼이 휘장도 없이 좌판을 벌여놓고 있었다.

한 사람은 카세트 테이프를 팔고 있었고, 한 사람은 여름모자 따위를 너절하게 벌여놓고 있었다.

물론 장터에는 그 두 사람만 촌닭처럼 서서 오뉴월 삼복 더위 속에서 떨고 있었다.

그 더위에 떨고 있는 모습도 엉뚱하고 처량하거니와. 매기도 전혀 없어 보이는데, 좌판을 걷어치울 생각조차 않고 있는 것도 희귀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노점상은 장터에 차를 멈추고 장터를 휘둘러보는 그들 일행의 어이없는 표정들을 구경삼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난전꾼들의 엉뚱한 표정이나 주위의 고즈넉함에서 삼차원의 세계로 불쑥 뛰어든 기분조차 느꼈다.

그들이 느끼기엔 분명한 별세계였다.

이런, 씨발. 우리가 저승길에 있다는 삼도천을 찾아왔나, 염라국의 문앞을 찾아왔나. 뭐 이런 데가 있어. 축담 아래 쪼그리고 앉으며 변씨가 뇌까린 푸념이었다.

구태여 재산장에 기대를 걸고 찾아왔던 것은 아니었지만, 경상도 쪽으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만나는 장터의 모습이 그처럼 황량했기 때문에 일행이 느끼는 실망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때였다.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이 조용하기 짝이 없던 장터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카세트 테이프를 팔고 있던 난전꾼의 좌판에서 고막을 찢어낼 듯한 고성의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무명가수가 취입한 노래였다.

그러나 음악은 두 곡을 채 넘기지 못하고 뚝 끊어지고 말았다.

노점상이 왜 갑자기 음악을 틀었다가 느닷없이 스위치를 꺼 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쪼그리고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운 변씨가 테이프 노점상에게 다가가 건성으로 인사치레를 건넨 다음 물었다. "재산장이 원래부터 이렇게 한산하오?" "둘이서 싸우면 말릴 사람 둘 정도는 있었던 장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된장에 박은 무꾸 (무) 장아찌처럼 쪼그라들기 시작하더니 요새는 얼음골에 들어온 것처럼 바람만 설렁해서 가만히 서 있으면 오뉴월이라도 어금니가 딱딱 마주칠 정도로 춥기만 하다 카이요. "

"그랬군, 형씨는 장삿길 나선 사람이 아니고, 피서 다니는 사람인 줄은 몰랐네. " "아직 마수거리도 못한 처진데…, 그렇게 머티를 주니까 허파가 확 뒤집힐라 카니더. " "재산장 다음엔 어느 장을 보시오?"

"봉화가 이칠장이고 춘양이 사구장이니까 입맛대로 찾아가는 게지요. 예천 읍내가 이칠장, 용궁이 사구장, 풍양이 삼팔장, 용문장이 오십장, 감천장이 일육장인데, 희망을 걸고 찾아가봤자, 장터 경기 물 건너간 지 오래 돼서 재산장이나 대동소이한 기라요. "

(김주영 대하소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