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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하연, EBS 드라마 '명동백작' 집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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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 자택에서 ‘명동백작’을 집필 중인 정하연 작가.

1953년, 소년에겐 명동이 놀이터였다. 삼촌 같은 '명동 주먹' 이화룡 덕분에 시공관도 수도극장.중앙극장도 무사 통과였다. 학교를 빼먹고 청동다방을 기웃거리면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인 '담배 할아버지' 오상순의 장광설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어느 때는 시인 김수영을, 어느 때는 수필가 전혜린의 얼굴을 스치면서 아홉살 소년은 훌쩍 어른이 되었다.

"60년대엔 젊은 극작가로 은성다방 말석에서 한 잔씩 건네는 술을 죄다 받아먹고는 소중한 원고 위에 구토를 했지 뭡니까."

방송 작가 정하연(60)의 눈에 그리움이 어린다. 50년 남짓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또렷한 그 시절을 '명동 소년'은 브라운관에 아로새기기로 했다. '장녹수' '왕과 비' '명성황후' 등 선 굵은 사극을 그려낸 솜씨를 살려 1950년대 명동을 중심으로 문화 예술사를 정리한 EBS의 24부작 드라마 '명동백작' 집필에 나선 것이다. 명동의 예술인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명동백작'으로 불린 소설가 이봉구를 매개로, 당대 문인과 화가.연극인 등의 삶을 그린다.


28일 저녁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만난 정작가는 "탈고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고 미소지었다. 16회 분량의 대본을 이미 넘겼고, 8월까지 남은 8회를 모두 완성할 예정이라고 한다. 드라마 방영은 9월 둘째주부터다. 시간에 쫓겨 촬영 중에 한 장씩 나오는 '쪽 대본'이 횡행하는 제작 풍토에서 방영 전 원고 완성이라니? 방송 3사에 비해 열악한 EBS의 제작 여건을 감안해, 완성 시나리오로 작업하는 영화 촬영처럼 한 장소에서 여러회 분량을 한꺼번에 찍을 수 있도록 서둘러 원고를 썼단다.

"어떻게 보면 시청자를 무시하는 행위죠. 반응을 보면서 내용도 조절하고 해야 하는 것이 방송 작가인데…."

불안하다고 했다. 30년 방송 작가 생활을 했지만 이번만큼은 시청자 반응을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명동백작은 기존 드라마와는 형식부터 다르다.

실존인물들이 실명으로 나오고, 실제 사건을 재구성했다. 중간중간 유족 등 관계자 인터뷰 장면도 삽입된다. 드라마라기보다는 재연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구성이다. 게다가 TV극에서는 금기시되는 별도의 해설자가 등장해 시대 배경을 설명하고, 작가의 주장을 여과 없이 전달한다.

수백년 전 얘기를 다룬 사극에도 역사 왜곡 논란이 심심찮게 제기됐다. "유족이 아직 남아 있는 50년 전 이야기를 쓰면서 이런 형식을 취하다니 논란이 심하겠다"고 하자, "욕먹을 각오는 돼 있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우선 50년대 명동에 녹아 있던 숱한 인물들 중 누구를 중점적으로 다루느냐는 것부터 논란이 될 것이다.

"서정주.황순원.노천명…. 당대에도 유명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지만 전 김수영.박인환.오상순.이중섭 등을 '50년대의 정신'으로 봤습니다."

모든 것이 폐허가 돼버린 시기에 자신만의 시와 그림을 위해 정면으로 맞부닥쳤다는 것이다. "작품의 평가, 업적, 문화사적 위치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정 작가는 거푸 말했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인물들이 40여명씩이나 등장하는 '기록 드라마'가 과연 재미있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시청률 3%면 만족한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도 멜로 드라마 '아내'로 '야인시대'를 위협했던 그가, 30%가 아니라 3%가 소원이라고?

"국민의 절반이 똑같은 드라마를 봐서야 되겠습니까. 재미보다는 역사를 기록한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명동백작이 성공하면 내년에는 60년대, 2006년에는 70년대 문화 예술사를 드라마화할 예정이다. 정 작가가 소설가 최인호, 극작가 오태석, 시인 정현종 등과 어울려 '소설가 황석영이네 전기 밥솥 팔아 갈비탕 먹고 영화 보러 갔던' 70년대 신촌 얘기까지 쓸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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