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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삼 칼럼]두 '딸깍발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실직자라는 한 독자로부터 최근 이런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요즘 저는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안겨준 감동에 힘입어 다시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IMF한파에 수해까지 겹쳐 나라꼴은 말이 아닌데도 그저 싸움질만 해대는 정치권에 분노하고 절망하던 차여서 그들의 사연이 더욱 더 가슴에 와 닿았는지 모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자신의 삶의 목표를 향해 꿋꿋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에서 저는 경제적 도움 이상의 힘을 얻었습니다.

이 땅의 가치나 권위는 모두 무너진 듯한 이때 이런 사람들을 부각해 사회의 등불이 되게 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가 지적한 두 사람은 신임 대법관 조무제 (趙武濟) 씨와 양심의 자유에 반 (反) 한다며 준법서약서 제출을 거부해 아직도 복역중인 최연소 장기수 강용주 (36) 씨였다.

필자도 두 사람과는 생면부지이고 그들의 사연도 신문 지면을 통해 스쳐 지나가듯 접하고 말았던 터라 독자의 지적에 따라 새롭게 이곳저곳을 뒤적여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보도내용을 확인해 보기도 했다.

그 결과 보도내용이 정확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보도된 것처럼 趙대법관의 재산은 부산시 동래구에 있는 25평짜리 아파트 (시가 6천여만원) 한채와 예금 1천75만원이 전부였다.

그의 말대로 재산이 적은 것 그 자체가 자랑은 아닐는지도 모른다.

"비록 재산이 많지는 않지만 대법관 봉급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 며 칭찬이나 호의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의도한 건 아니나 바로 그런 자세가 그를 더욱 더 돋보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딸깍발이' 란 지칭 그대로 청렴과 원칙주의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창원지법원장 시절 부산에서 출퇴근하게 되자 그는 관용차는 창원 관내에서만 타고 부산에서 창원까지는 버스 이용을 고집했다.

"그분은 마치 도를 닦는 사람같이 느껴진다" 는 주위 법관들의 말도 과장이 아닌 것 같다.

보도기사에서 찾아본 강용주씨의 사연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그의 용기도 용기지만 그 어머니 조순선 (72) 씨의 꿋꿋함이 아들 못지않게 감동적이었다.

12년 전 처음 면회갔을 때 전향하면 3년만 살면 된다는 교도관의 말을 듣고 어머니는 기뻐서 아들에게 전향을 권유했다.

그때 아들은 "그런 말 하시려면 다신 오지 마세요" 라고 잘랐다.

그 말을 들은 뒤로는 조씨는 이제껏 전향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다.

정부가 준법서약서 제도를 발표한 며칠 뒤 비로소 어머니는 12년 만에 말을 꺼냈다.

"너는 준법서약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주세요. " 형기는 2006년에나 끝난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내가 2006년이 되기 전에 죽으면 어떻게 할래?" "우리 어머니는 절대 안돌아가실 거예요. " 다시 모자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래, 저승사자가 오라고 해도 절대 안갈란다.

힘내고 건강하게 있어라. " "어머니, 감사합니다. "

우리 사회에는 강씨와 생각을 달리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강씨의 신념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다른 견해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위해 헌신하는 그 자세만은 평가해야 할 것이다.

강씨도 또 다른 의미의 '딸깍발이' 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원칙과 신념을 고집스레 지키는 사람이 너무나도 적다.

대부분이 현실주의자다.

여당에도 야당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얼굴들이 합류하는데도 정치의 모습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그 새 얼굴들마저도 기존의 구조와 환경에 적응해 현실적 이득을 얻기에 급급했지 현실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자신의 소신과 포부를 지켜나가는 용기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 인물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신념과 용기가 부족한 것이다.

작금의 고액과외사건도 마찬가지다.

사연 하나하나를 들어보면 다 이유가 있고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다.

좋게 말하면 그들은 현실적 이득이나 필요 앞에 도덕적 책무를 잠시 잊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건 없다.

우리들의 사회는 결국은 상황에 뛰어난 적응력을 보이는 현실주의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실적 고통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이상과 신념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고 발전하는 법이다.조씨와 강씨의 사연이 다시 한번 읽혀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유승삼(중앙M&B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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