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공약 심판” 일본 지자체장들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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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일본에서 정치가 요동치면서 ‘지방자치단체장의 반란’이 일어나고 있다. 전국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광역자치단체)’ 단체장들로 구성된 전국 지사회는 14~15일 회의를 열고 다음 달 30일로 예정된 총선 대책을 마련했다. 이들은 여야 정당의 정책 공약(매니페스토)을 점수화해 국민에게 공표하는 등 국정에 적극 개입하기로 했다. 지지(時事)통신은 16일 “지자체 단체장들이 나랏일을 담당하는 정당 정책을 점수로 평가하는 것은 사상 처음”이라고 보도했다.

정치력 부재로 혼돈에 빠져든 자민당에 대한 심판 움직임이 가속화하고 있어 단체장들의 정당 평가는 총선 판도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칠 전망이다. 9개에 이르는 평가 항목은 지방세·공공사업 확대 등 모두 지방 활성화 대책들이다. 평가의 핵심 잣대는 공약에 얼마나 실질적인 ‘지방 분권’ 정책을 포함하는지가 될 전망이다.

지사들은 총선에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방안도 심도 깊게 논의했다. 신중론을 감안해 채택하지는 않았지만, 일부 지사는 지지 의사를 밝히자고 주장했다. 자민당이 영입을 추진했을 만큼 인지도가 높은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大阪)부 지사는 “지방의 활성화는 지방이 정치적 파워를 가져야 해결된다”며 특정 정당 지지 표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사들이 집단 또는 개별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할 경우 집권 자민당은 상당한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자민당은 이미 올 4월 이후 치러진 지자체 단체장 선거에서 5연패를 했다. 12일 민주당이 압승한 도쿄도 의회 선거에서도 지역 주민들은 자민당에 ‘노(No)’ 신호를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지사들의 민주당 지지 의사 표시가 있으면 유권자들이 호응할 가능성이 크다.

지방 살림을 책임지는 단체장들이 이례적으로 총선에 관여하고 나선 것은 갈수록 침체하고 있는 ‘지방 되살리기’를 위해서다. 집권 여당이 파벌 싸움만 벌이고 지방과 국민을 방치했기 때문에 지사들이 직접 ‘표의 심판’을 내리자고 나선 것이다. 태평양전쟁 이후 소작농 폐지와 지방 육성 정책을 통해 윤택했던 일본의 지방은 1990년대 버블 경제 붕괴 이후 급격한 경제적 쇠퇴를 겪었다. 2001년부터는 중앙정부의 ‘성역 없는 개혁’ 방침에 따라 지방 경제를 떠받쳤던 공공사업이 대폭 축소되는 바람에 실업자가 쏟아지고 도시와의 소득 격차도 더욱 벌어졌다. 2006년 6월 파산한 홋카이도(北海道) 유바리(夕張)시의 재정 파탄은 지방 경제의 심각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유바리시는 대규모 시설 투자 이후 경기 악화로 360억 엔(약 5000억원)의 빚더미에 올랐다.

변호사 겸 탤런트 출신의 하시모토 지사가 이끌고 있는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부도 극도의 재정난을 겪고 있다. 하시모토는 3조2000억 엔(약 44조원)에 달하는 적자 해소를 위해 ‘오사카 유신 계획’을 추진하면서 공무원 급여를 12% 삭감하는 등 재정 건전화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도요타자동차·파나소닉 등의 제조 공장을 유치해 상대적으로 여건이 좋던 아이치(愛知) 등 ‘부자 지역’에서도 세계 불황의 여파로 지역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지사들은 “지방의 재정 파탄이 악화되면 2012년에는 13조1000억 엔(약 180조원)의 재원이 부족할 것으로 추산했다”고 요미우리(讀賣)신문이 16일 보도했다.

도쿄=김동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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