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재민들 대피소 표정]세끼 컵라면으로 때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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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퀴퀴한 냄새가 나는 임시대피소. 분유와 기저귀가 없어 애태우다 끝내 울음을 터뜨린 젖먹이를 둔 엄마, 며칠째 젖은 옷을 갈아입지 못한 부녀자들, 부족한 식수와 먹거리 - . 수재민 대피소의 이재민들은 모든 것이 부족하고 불편한 하루하루의 고통 때문에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는 허탈감을 느낄 겨를도 없는 것 같았다.

10일 현재 서울 57개, 경기도 2백7개 대피소에서 생활하는 이재민은 각각 2천2백여명과 1만2천여명. 많은 사회단체와 시민들이 이들을 돕기 위한 자원봉사와 모금활동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 이재민들에게는 충분한 지원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재민들이 갈아입을 옷이 없어 며칠째 물에 젖은 축축한 옷을 그대로 입고 지내는가 하면 하루 세끼를 컵라면으로 때우는 실정이다.

◇서울 (수락초등학교) = "12, 13세짜리 두 아들이 설사와 복통에 시달리고 있어요. 급한대로 구급약을 먹이고 있지만 낫질 않아요. " 10일 오전 이곳에서 만난 노원구 노원마을 주민 변정숙 (38.여) 씨는 "무엇보다 시름시름 앓는 두 아이가 가장 큰 걱정" 이라며 울먹였다.

상계1동 4백여가구 주민 1천여명이 지내는 이곳에는 18개의 교실마다 허탈하고 지친 모습의 수재민들로 가득 차 있다.

이재민들은 물에 젖은 옷을 며칠째 계속 입고 있었고 25평 남짓한 교실에서 50명이 넘게 새우잠을 자고 있다.

◇파주시 (봉일천중학교) =조리면 일대 59가구 1백50여명이 수용돼 있는 교실 곳곳에 젖은 옷가지가 널려있고 학교 전체에 퀴퀴한 냄새가 가득했다.

세제와 물이 부족해 씻지 못해 음식물 찌꺼기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냄비들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어 흡사 아프리카 난민수용소를 방불케 했다.

김안순 (39.여) 씨는 "유일한 반찬이었던 김치도 다 떨어져 오늘 저녁부턴 라면만으로 끼니를 때워야 할 판" 이라고 허탈해 했다.

◇의정부시 (경민여상) = "다리에 묻은 흙이라도 씻어내려고 했지만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결국 운동장에 고인 물로 씻었어요. " 이재민 서순자 (徐順子.44.여) 씨는 "2백명이 넘는 남녀가 야외 간이화장실 1개를 함께 사용하는데다 모포 등 침구도 매우 부족한 실정" 이라고 하소연했다.

대피소는 50여평 규모의 체육선수 생활관으로 이곳에서 이재민 2백50여명이 고통스런 생활을 하고 있다.

◇동두천시 (동두천초등학교) = "지원물품 가운데 양복.모포.부탄가스 가운데 하나만 고르라고 하더군요. " 이재민 한미경 (47.여) 씨는 "이 와중에 양복을 어디다 쓰겠으며 부탄가스는 받아봐야 버너가 물에 젖어 쓰지도 못한다" 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곳 2백20여명의 이재민들은 턱없이 부족한 구호물품으로 애를 태우고 있다. 이재민들은 "구호품 가운데는 당장 입지도 못할 겨울옷이 섞여있을 뿐 아니라 먹거리가 모자라 복구작업을 마치고 밤늦게 대피소로 돌아와도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며 관계당국의 관심을 촉구했다.

◇고양시 (삼송초등학교) =2백50여명의 이재민들은 신도농협과 신도동 부녀회원들이 날라다 주는 식사로 끼니를 때우고 있으며 시와 복지단체 등에서 전달해준 모포와 치약.칫솔 등 생필품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민대책위원장 이유태 (李裕泰.41) 씨는 "대부분 이재민들이 세간살이 하나 제대로 건지지 못한 채 속옷 바람으로 집을 뛰쳐나온 상태여서 속옷을 비롯한 의류와 생필품 등 필요한 물품이 한 두가지가 아닌 상태" 라고 말했다.

전익진.최재희.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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