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대 제약사 年 60조원 투입 … 한국은 떠오르는 시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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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호 20면

지난달 19일 AP통신과 영국 BBC방송 등 주요 외신들은 미국의 메이요클리닉이 발표한 새로운 연구 결과를 일제히 보도했다. 수술을 할 수 없을 만큼 암세포가 전이된 말기 전립샘암 환자 세 명의 이야기였다. 전립샘암은 미국 남성들이 가장 잘 걸리는 암이다. 영국에서도 매년 1만 명의 남성이 전립샘암으로 사망한다. 그런데 새로운 면역치료제 임상시험에 참여한 이들은 암세포가 극적으로 줄어 수술까지 받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이 전해진 후 메이요클리닉에는 임상시험에 참여하겠다는 문의가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확률 17%의 도전 신약 임상시험

임상시험이란 안전성과 효과가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새로운 약이나 치료법을 환자에게 써보는 것이다. 임상시험에 참여할 때는 예기치 않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환자와 보호자들은 임상시험이 기본적으로 시험 대상자인 환자 자신보다는 앞으로 그 병에 걸릴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일부 피험자들은 자신이 참여하는 시험의 의미조차 정확히 알지 못할 때가 있다. 한 가닥 희망이라도 찾으려는 환자를 이용한다는 논란이 일기도 한다. 임상시험 동의 절차에서부터 문제가 없도록 객관적으로 꼼꼼히 확인하는 장치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임상시험은 환자들에게 '기회'가 되기도 한다. 검사나 치료약들을 무료로 받을 수 있고, 일반 환자보다 더 세심하고 질 좋은 진료를 받을 수 있다. 특히 혁신적인 신약의 임상시험은 환자들의 운명을 가르기도 한다. 백혈병(혈액암) 치료제 글리벡의 임상시험이 대표적인 예다. 미국의 백혈병 발병자 수는 연간 4500여 명 안팎으로 지난 10여 년간 변함이 없지만, 사망자 수는 1998년 2400여 명에서 글리벡 출시(2001년 말) 후인 2006년엔 600여 명으로 크게 줄었다. 그만큼 백혈병 치료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약이다.

글리벡을 개발한 다국적 제약사 노바티스는 98년 미국, 그리고 99년 유럽에서 만성골수성백혈병(CML) 환자들에게 처음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 약을 먹은 환자 대부분이 효과를 보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노바티스사와 각국 정부에는 임상시험에 참여하게 해달라는 전 세계 CML 환자들의 요청이 밀려들었다. 우리나라 환자와 그 보호자들도 청와대에까지 탄원서를 보냈다. 결국 정부의 중재로 노바티스사는 2001년 초 임상시험 대신 국내 환자들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무상으로 이 약을 공급했다. 유럽과 미국의 환자들에 비하면 2~3년 뒤에 약을 써볼 수 있었던 셈이다.

글리벡은 다국적 임상시험에 대한 국내 의료계·환자·정부의 인식을 크게 바꿔놓았다. 그 전까지는 효과나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약물의 시험에 우리 국민이 동원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이 있었다. 95년 의약품임상시험관리기준(GCP)을 전면 도입해 체계적인 관리를 시작하긴 했지만 2000년 식약청이 승인한 다국적 임상시험은 5건에 불과했다. 2001년 이후 대학병원의 일부 의료진을 중심으로 다국적 임상시험을 국내에 유치하려는 시도가 많아졌다.

정부의 임상시험 승인 절차도 크게 정비됐다. 그 결과 2005년 식약청 승인을 받은 다국적 임상시험은 95건으로 늘었다. 국내 제약사의 임상시험 건수(90건)를 처음으로 넘어섰다. 지난해엔 216건(국내 184건)에 이른다. 2007년 홍콩대학병원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서울은 아시아 대도시 중 다국적 임상시험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이다.

다국적 제약사들의 입장에서도 한국은 매력적이다. 질환별 환자군이 다양하고 시험 비용이 싼 나라다. 선진국 못지 않은 의료 수준을 갖춘 것도 큰 장점이다. 지난달엔 유럽연합(EU) 1위 규모인 프랑스계 다국적 제약사 사노피-아벤티스의 임원진이 방한, 보건복지가족부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돌아갔다. 임상시험을 늘리는 것을 포함해 2013년까지 한국에 700억원을 투자한다는 내용이었다. 세계 1위인 화이자, 2위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도 한국에 임상시험 관련 투자를 늘리고 있다.

정부는 2007년 12월 국가임상시험사업단을 만들어 경제적·산업적 부가가치가 큰 임상시험을 하나의 산업으로 육성하는 전략을 세웠다. 사업단의 신상구(서울대 의대 약리학교실 교수) 단장은 “선진국 제약사들이 신약을 개발할 때 과거엔 전(前) 임상인 동물실험에 연구비의 80%를 썼지만 지금은 60% 이상을 임상시험에 쓴다”며 “전 세계 400대 제약기업이 매년 임상시험에 투자하는 돈이 60조원, 벤처까지 더하면 110조원가량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내 의료기관들의 무분별한 임상시험 유치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가톨릭대 의대 서울성모병원의 김동욱(종양내과) 교수는 “좋은 신약의 임상시험을 유치하는 것은 환자에겐 신약을 빨리 써볼 수 있고 의료진에겐 국제적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기회”라며 “그럴수록 윤리 기준을 철저히 지키고 환자 개개인의 상태를 정확히 판단해 적용하려는 연구자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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