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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희열을 잘 아는 기러기는 실패 두려워 않고 날아오른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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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호 11면

황링이 작성한 작문 원고(왼쪽)와 현대 중국어로 고쳐 쓴 글.

“기러기는 나는 걸 배우면서 겪는 온갖 어려움과 하늘로 날아오르는 희열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곤란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공을 추구한다. 기러기는 성(成)과 패(敗)를 꿰뚫어본다.”

중국을 놀라게 한 고3의 갑골문 실력

중국 쓰촨(四川)성의 한 고교에 다니는 황링(黃<86C9>·20·사진)이 지난달 실시된 중국 대입 학력고사인 가오카오(高考:총점 750점) 작문시험에서 쓴 머리글이다. 올해 시험 제목은 ‘숙실(熟悉: 두루 잘 앎)’이었다.

그러나 황링은 60점 만점인 작문 시험에서 8점밖에 얻지 못했다. 현대 중국어가 아니라 고대 문자인 갑골문(甲骨文)으로 글을 썼기 때문이다. 갑골문은 기원전 10세기 상(商)나라 시대에 개발돼 지금까지 1000여 자가 발견됐다. 갑골문을 공부한 서예가들조차 400∼500자밖에 알지 못하는 현실에서 일반 교사들이 황의 글을 해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쓰촨성 교육당국은 작문 답안지를 채점하기 위해 12개 조(組), 1200명의 교사를 동원했다. 황이 쓴 갑골문은 채점관에게도 암호문 같은 꼬부랑 글자였다.

황링은 90분 동안 갑골문자로 800여 자의 문장을 썼다. 갑골문에 없는 글자는 전자체(篆字體:周와 秦에서 쓰인 서체) 중 대전(大篆:周나라 때 만든 서체)을 활용했다. 현대 중국어에서 많이 쓰이는 ‘적(的)’자가 그런 경우였다.

대입 작문시험 8점 받아 논란
황링이 얻은 8점은 대학 입학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다. 올해 작문 최고점은 59점이었다고 한다. 한국 못지않게 입시 경쟁이 치열한 중국에선 매년 1000만여 명의 수험생이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네티즌들은 황링의 사연이 알려지자 “시험 규정상 고문자를 쓰지 말라는 조항이 없지 않느냐”며 항의성 댓글을 올렸다.

그렇다면 고문자 전문가들이 해독(?)한 황링의 작문 내용은 무엇일까.
황링의 글은 기러기에서 아름다운 꽃, 대해(大海)를 향하는 강물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런 다음 인간 세상으로 눈길을 돌린다. “성과 패를 잘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더욱 존중하게 만들고 생활에 더 큰 희망을 주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준다…성패를 꿰뚫어보면 자신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실패에 직면해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성공할 때는 자신이 처한 위치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는 마땅히 숙실과 평상의 마음가짐으로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해야 한다.”

황링은 본론 부분에서 실패와 성공을 잘 아는 게 인생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설명했다.

먼저 실패와 관련해선 “실패는 인생의 중요함과 의의를 깊게 한다. 한 개인의 생명대도(生命大道)에서 실패와 곤란 없이 뻥 뚫린 길은 불가능하다. 실패에 부닥쳐 용기와 희망, 믿음, 인생의 의미를 잃을 때 실패를 잘 알고 꿰뚫어 본다면 절대로 비관하거나 염세(厭世)하지 않고 실패 원인을 탐구할 것이다.…숙실의 인간은 실패가 성공의 기반이자 인생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는 걸 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실패를 가장 낙관적인 마음자세로 맞이한다.”

성공에 대해선 “성공을 잘 아는 사람은 성공이란 노력 끝에 다다르는 하나의 상태임을 안다. 그래서 성공을 원하는 자는 부단하게 공부하고 자기를 새롭게 한다. 성공을 꿰뚫어보는 사람은 일시적인 성공 때문에 자기를 잊지 않을뿐더러 더욱 깊은 지식을 구하며 자기 위치를 숙지한다. 사회적 경쟁이 치열한 요즘, 진정하고도 장기적인 성공을 거두는 자는 자기 위치와 사회 조류를 잘 알고 있다. 성공을 분명히 아는 자는 조류의 끝에 자리잡고 있다.”

고교 졸업생으로선 상당히 성숙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황링의 부모들은 돈 벌러 고향을 떠나 선전(深<5733>)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사찰이나 비석에 쓰인 글들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동년배에 비해 사고의 폭과 깊이를 가다듬었을 것이다. 그는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친구들에 비해 소심한 편”이라며 “역사 시간에 갑골문 같은 고문자를 배우는 게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작문시험 5분 전에야 갑골문으로 답안지를 쓰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는 “ 기회가 있는데 이를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어릴 때부터 사찰·비석의 古文 좋아해”
황링은 작문의 말미에 주링허우(90後:1990년대 출생자) 세대의 특징을 드러냈다. 바로 중화(中華)민족주의 성향이다. 사물에서 인간으로, 다시 국가와 민족으로 논점을 넓혔다. “(성패와 관련해) 한 국가, 한 민족 역시 개인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화민족은 과거의 실패를 숙실하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강대한 민족적 자신감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민족 부흥의 길을 달릴 것이다. 중화민족은 개혁의 성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부단하게 진보하고 진흥(振興)하리라는 걸 알 수 있다.”

황링의 행동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신경보(新京報)는 지난달 21일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기사에서 몇몇 관점을 소개했다. 쓰촨대의 고문자 전문가 허산칭(何山靑) 교수는 “고문자 숫자가 많지 않아 (표현에)한계가 있는데 800여 자의 작문을 했다면 대단한 실력”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험 전에 (작문)준비를 했을 것으로 본다. 갑골문을 정확히 썼는지 의심되는 부분도 있다”고 덧붙였다. 쓰촨성 사회과학원의 후광웨이(胡光偉)는 “자기를 드러내는 걸 좋아하는 주링허우 세대의 특징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황링은 요즘 스타로 부상했다. 서남재경대학 천부학원(天府學院)은 4년 장학금을 제안했다. 하지만 푸단(復旦)대 측에선 “입학을 허용하면 정상적으로 시험을 치른 다른 수험생에게 불공평할 수 있다”고 반응했다. 그런 논란 속에서 황링은 “대학에서 언어문자학을 전공해 고문자 연구 방법을 개발하겠다. 대학 졸업 후엔 공자학원(孔子學院)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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