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사우디에 다시 눈돌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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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로 실업이 증가하고 공장이 문을 닫고 자금이 경색돼 있는 이때, 과거 70~80년대 우리경제 부흥에 큰 몫을 했던 중동지역,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 다시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올해 봄 부임 이래 만난 사우디인들은 정부고위인사나 기업인 할 것 없이 모두 사우디 인프라 건설에 참여했던 한국의 기업과 근로자들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사우디 외무부.내무부 등 주요 정부청사도 한국건설회사 작품이요, 각국 외교관들이 거주하는 외교단지도 80년대초 한국회사가 만든 것이다.

그런데 사우디인들이 이같은 찬사에 뒤이어 잊지 않고 덧붙이는 말이 있다.

요새 한국이 사우디를 너무 멀리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한때 15만명에 이르렀던 한국인이 이제는 약 1천5백명에 불과하며 주요 경제인들의 방문도 뜸하니 그렇게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물론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기본적인 인프라가 상당히 구축돼 사우디측 수요가 하이테크 집약적 산업으로 바뀔 때 우리가 이를 따라가지 못했고, 다른 한편 노동집약적 부문에서는 후발 개발도상국보다 임금경쟁력이 떨어져 우리가 발 붙일 자리가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사우디 정부나 기업인들은 한국이 IMF사태로 요새 같이 어려운 때에 기술과 기계설비.전문인력만 갖고 들어와 사우디의 자본 및 각종 유리한 산업입지 조건과 결합하면 좋은 합작사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우디는 최근 유가하락으로 정부부문은 위축되고 있으나 민간부문은 계속 발전하고 있으며, 특히 금융기관은 막강한 유동자금을 보유 (11개 시중은행 총 1천억달러) 하고 있다.

아울러 사우디정부는 석유에 치중한 경제구조를 다변화하기 위해 산업투자에 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산업 프로젝트 총액의 50%까지는 정부기관에서 무이자로 대출해 주며 이에 더해 25%는 민간은행이 저리로 대출해 준다.

또한 10년간에 걸친 세금면제 (자산 증액시 10년 추가) , 원자재 등 수입에 대한 관세면제, 해외로의 과실송금 보장, 산업용수.전기.공장부지 등에 대한 파격적인 정부보조 (공장부지 1㎡당 연간 임대료는 27원에 불과) 등 중동내 어떤 국가들보다 많은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잘 발달된 도로망, 세계최대 산유국으로서의 구매력, 높은 인구증가율 (연 3~4%)에 따른 시장규모 확대, 여타 5개 걸프협력회의 (GCC) 국가 시장진출의 거점역할, 풍부한 저임금 노동력 (서남아시아.수단인 등) , 저렴한 석유관련 원자재 및 중간재, 그리고 안정된 정치환경 등 투자에 좋은 여건을 구비하고 있다.

사우디는 특히 비석유분야 제조업 (식료품, 전기.기계, 각종 부품 산업 및 플라스틱.의류.완구.스포츠용품 등 소비재류) 이 아직 성숙단계로 들어가지 못해 우리 산업투자 진출의 여지가 많다.

물론 사우디의 전반적 환경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우디인들은 이슬람 종주국으로서 자존심이 강해 배타적 성향이 있으며, 모든 사우디내 영업행위 뿐 아니라 입.출국까지도 사우디인 스폰서를 통하지 않으면 어렵게 돼 있다.

또 분쟁발생시 국제적 기준에 어긋나는 행태를 보이기도 하고 외국기업에 대해 세금면제기간이 지난 뒤에는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기도 한다.

그리고 뜨거운 날씨, 엄격한 이슬람율법을 따르는 보수적 생활양식 등도 사우디를 멀리 느껴지게 하는 요인들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조건에서도 미국인 4만명, 영국인 3만명 등 많은 외국인들이 이곳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이유는 이윤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서유럽.일본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53개국이 3백79건의 합작투자 사업을 하고 있으며 그 총액은 2백46억달러에 이른다.

한국이 여기서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제로라면 다시 생각해 볼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사우디의 제3의 수출대상국이며 매년 60억달러에 이르는 무역적자를 내고 있는 우리로서는 합작투자를 통한 사우디 진출을 적극 추진해야 할 것이다.

지난 10여년간 우리는 중동이라면 뜨겁고 답답하다고만 치부하고 너무 멀리한 것은 아닌지, 경제적 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경제적 어려움들을 극복할 투지가 약했던 것은 아닌지 돌이켜 생각해 본다.

이제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중동에서 땀을 흘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김정기 <주 사우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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