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소녀들이 드세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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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고2 金모 (18) 군은 요즘 '여자에게 당했다' 는 고민에 빠져 있다.

교내 같은 서클의 3학년 여자선배 집에 불려갔다가 키스는 물론 반강제로 성관계까지 당할 뻔했기 때문이다.

PC통신 성상담 코너인 '청소년 세계' 조민자 상담실장은 "여학생쪽이 육체 관계에 대해 너무 적극적인 데 당황하는 남학생들의 상담이 최근 늘고 있다" 고 말한다. "사랑해, 넌 내 거야. " 최근 서울 이대부고에서 2학년 여학생이 수업시간에 건너편 남학생에게 전달하다 교사에게 들킨 쪽지의 내용이다.

성 (性) 이 무너지고 있다. 중.고교 여학생들이 급속히 남성화.개방화하고 있다. 애정표현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의식과 행동이 대담하고, 적극적으로 변해가고 있고 성적도 남학생을 거의 따라잡고 있다.

우선 수능성적이 남학생과 별 차이가 없다.

고득점자는 남학생이 더 많지만 올해의 경우 평균점수는 여학생이 2점 더 높다. 여학생 파워는 남녀공학에서 특히 뚜렷하게 드러난다.

총학생회장을 맡거나 서클활동을 주도하는 것. 서울 대일외국어고의 경우 올해부터 학생회장에 여학생도 출마할 수 있게 하자 곧바로 여학생이 당선됐다.

이 학교 3학년 李모양은 "지난해엔 여학생 입후보 제한방침에 반대하는 서명운동 움직임도 있었다" 고 밝혔다.

서클활동도 학보사.영자신문반.미술반.기악반 등은 여학생 주도로 운영된다.

중학교도 사정은 마찬가지. 서울 은평중 모교사는 "연극공연.합창대회.장기자랑 등의 행사를 으레 여학생이 주도한다.

이성교제 때도 편지.선물.전화를 통해 여학생이 직접적으로 애정표현을 한다. 여성스럽고 차분한 애들은 극소수다.

전반적으로 여자애들이 여자답지 못하고 거칠기까지 해 남성화하고 있다" 고 말한다.

이들의 말투.행동은 남학생 못지 않게 거칠다.

"미친 ×" "지랄이야" "짱 (長.최고의 의미)" "깝치고 (설치고) 있네" 등의 표현을 교실에서 흔히 들을 수 있다.

어쩌다 벌이는 싸움도 '치고 받는' 남자형이 주류를 이룬다.

"머리끄덩이를 잡는 일은 거의 없다. 주먹질과 발길질을 주고받는다. " (서울여고 1년 모양) 요즘 여중.고생의 성향은 "얌전하다" "소극적이다" "여자답다" 는 전통적 이미지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데서 가장 잘 나타난다.

"여자다운 척 내숭떨면서 만화책에 나오는 청순가련형으로 구는 애는 '왕재수' (재수없는 애) 로 찍힌다" (강남여중 3년 모양) 는 게 서울.지방을 불문한 세태. '어머나!' 라는 감탄사나 입을 가리고 '호호호' 하는 웃음은 사라진지 오래다.

강북지역 모 인문계 여고 2년 한 반 (51명) 을 지난 18일 설문조사한 결과는 '여성' 이 아니라 독립적인 개체로 살겠다는 의식을 잘 대변한다.

이들은 "평생 직업을 갖겠다" (86%) ,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 (61%) 는 생각을 갖고 있다.

술도 과반수 (57%)가 한 달에 1~2차례 소주 반 병쯤 마신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이동원 교수는 이에 대해 "자녀수가 1~2명으로 줄어들면서 가정교육에서 남녀차별이 거의 없어진 데다 매스컴에서 활발하고 적극적인 여성상을 부각시키는 때문" 이라고 분석하고 "여학생들이 주체적.개방적으로 변해가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한 현상" 이라고 평가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조혜정 교수는 "이들이 고교 졸업 후에는 남성이 지배하는 현실에 적응하느라 움츠러들게 된다" 면서 "사회 전반의 평등이 이뤄지지 않으면 이는 가정과 사회의 커다란 갈등 요인으로 등장하게 될 것" 이라고 경고했다.

기획취재팀 조현욱.신성식.김관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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