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 현대사진 대표작가 10 ‘2009 오디세이’전 4 - 이갑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제 식구 자랑하면 못난 사람이라지만, 밖에 나가 한국 사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랑할 만한 사진가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 자랑거리의 앞자락에는 늘 이갑철이 있다. 그의 작품집과 자료는 언제나 다른 서류와 옷가지를 밀쳐내고 내 여행가방 속 명당자리를 차지하곤 한다. 덕분에 프랑스의 대표적 사진평론가 크리스티앙 코졸과 나는 이갑철의 작품론에 서로 죽이 맞아 파리 모 식당의 와인을 여러 잔 축냈다. 중국 베이징에서는 사진전문지 기자에게서 그의 작품을 소개해준 보답으로 대가성 점심까지 제공받았다. 국적을 막론하고 그의 사진을 보고 난 많은 이들은 작품이 마음에 박혀 두고두고 떠오른다고 말하곤 한다.

이갑철(50)씨가 2002년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 첫선을 보인 ‘충돌과 반동’ 연작 중 한 작품. 기존 사진의 기준에서 보면 불온하고 불경해 보일 정도로 거칠면서 먹먹한 정서가 보는 이의 눈을 번쩍하게 만든다.

중학생 시절부터 잡화점을 하던 부모님의 돈통에서 슬쩍한 자금으로 필름을 사댈 만큼 사진에 욕심이 많았던 이갑철의 작품에는 그럴 만한 매력이 있다. 그것은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 즉 대상 너머에 있는 우리들의 무의식과 심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거친 흑백 입자의 사진 속에서 대상들은 온전한 형태를 갖지 못하고 잘려져 있거나 흐린 초점으로 흔들린다. 심지어 나비나 소, 닭은 물론이고 제사상의 숟가락이나 사내의 손에 들린 바위마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담고 있다. 이러한 ‘시각적 노이즈’는 마치 질서를 찾지 못한 우주의 혼돈 상태를 보여주듯 엄청난 힘과 긴장감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슬프고 한스러우면서도 힘차고, 죽음과 이별을 연상시키면서도 생명의 기운으로 넘쳐난다.

이렇듯 그의 작품 속에는 굿·다비식·제사 등 우리네 문화 원형이 주로 등장하지만 사실 그를 사로잡는 건, 그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들이 풍겨내는 에너지이다. 그래서 그는 어디를 촬영가든 사전 조사를 하지 않는다. 대신 현장이 풍겨내는 분위기에 몰입하기 위해 촬영가는 내내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감정마저 한곳으로 모으곤 한다. 그때 듣는 음악이 주로 불경이나 동요라니 독실한 기독교인 치고는 좀 별난 취향이다.

대상의 생명력과 주술성을 담는 작업이니 마음을 가다듬고 갔다고 해서 곧장 원하는 사진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평생 구도자가 되는 심정으로 사진기를 들고 전국을 누빈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다 한 장의 사진이라도 얻었다는 느낌이 들면 선술집에 들어가 막걸리 한 사발을 기울이며 전율했다. 덕분에 이제는 비가 오거나 눈이라도 올라치면 어느 곳을 가야 이런 날의 분위기를 제대로 담을 수 있을지 직감이 온다고 한다. 그나마도 제대로 된 행정구역명을 외워본 적이 없다. 그저 동물이 길을 찾아가듯 본능에 맡길 뿐이다. 같은 곳을 여러 번 들러도 사람들에게 정을 주고 오지도 않는다. 익숙해지면 원하는 게 보이지 않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이갑철은 고전적 의미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출발해 그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새로운 영역을 확장한 작가다. 그는 요란한 방식으로 현대 사진을 추구하지도, 그렇다고 고지식하게 다큐멘터리 형식만을 고수하지도 않은 채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 내고 있다. 말주변보다는 술기운이 좋지만, 그 술도 마다하고 촬영 나서기를 더 좋아하는 숫기 없는 이갑철은 요즘 ‘공즉시색’이라는 화두에 푹 빠져있다. ‘돌이켜 보니 그 동안의 작업 속에 너무 많은 집착이 들어있더라’고 말하는 그가 또 다시 어떤 작업으로 우리를 서늘케 할지 지켜볼 일이다.

송수정

2009 울산국제사진페스티벌 큐레이터·
2009 세계보도사진상 심사위원

◆‘2009 오디세이’부대행사=새로운 밀레니엄 이후 10년. 한국 현대사진의 중심에 선 대표작가와 그들의 최고 작품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전시는 7월 14일부터 8월 18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립니다. 전시기간 중 4회에 걸쳐 참여작가들이 사진예술을 강의하는 ‘마스터 클래스’가 진행됩니다(50명 한정·참여비 3만원). 7월 18일 구본창, 25일 이갑철, 8월 1일 오형근, 8일 고명근씨가 강사로 나섭니다. 어린이 관람객을 위해 진행하는 아카데미 ‘카메라 루시다’도 열립니다. 프로그램 예약은 02-2000-6471, 6474. 입장권 예약은 티켓링크(1588-7890)에서 합니다.

◆이갑철=1959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신구대학 사진과를 나와 2005년부터 프랑스 ‘Vu’ 에이전시 소속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사진에는 귀신이 산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감성의 ‘충돌과 반동’으로 충만한 작업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 사진이면서도 무기(巫氣)가 서린 묘한 정신성이 보는 이를 긴장시킨다. 1년의 반을 타지에서 보내는 지독한 여행가다. 그는 오늘도 가슴으로 찍은 사진으로 들려줄 이야기를 찾아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