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方告訴之國의 오명을 벗어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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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렀다. 서로 양보하고 풍속이 아름다우며 예절이 바르다는 의미였다. 조선 중기 실학자 이익은 이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봤다. 저서 『성호사설』에 “우리나라는 본래 인정이 많은 나라, 즉 인정국(人情國)이라고 한다. 이는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뇌물을 줘야 일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썼다. 크고 작은 일 처리 때마다 뇌물이 오가고 사사로운 정에 끌려가는 풍속을 지적한 것이다.

요즘은 어떨까. 법조인들은 대한민국을 ‘동방고소지국(東方告訴之國)’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고소·고발이 폭증하면서 고질적인 병폐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 해 동안 고소·고발된 사람은 76만 명으로 전체 형사 입건자의 28.1%다. 국민 80명당 한 명이 고소당한 셈이다. 매년 1만여 명이 고소당하는 일본(인구 1억2600만 명)보다 76배, 인구 비례를 감안하면 155배나 고소 사건이 많았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왜 이렇게 고소가 많을까. 두 가지 원인이 지적된다. 우선 검찰과 경찰이 고소인의 입장에서 조사하는 형사 사법의 구조적 문제가 있다. 이로 인해 공짜로 신속하게 민사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고소를 남발하곤 한다. 둘째는 법률문화의 후진성이다. 사적 거래나 계약을 할 때 법적 서류를 챙기지 않다가 서로 다툼이 생기고 나서야 고소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고소 사건이 늘어나면 사회적으로 불신과 갈등이 만연하고, 검사와 경찰은 민사적 성격의 고소 사건 처리라는 늪에 빠져 본연의 직무에 소홀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남고소(濫告訴:고소 남발) 문제와 관련해 중국 역사에 독특한 궤적을 남긴 법률가가 두 사람 있다. 춘추시대 정(鄭)나라 등석(鄧析)과 중세 송나라 등사현(鄧思賢)이다.

등석은 춘추시대 제자백가 중 법가에 속한 학자다. 강대국 사이에 낀 작은 정나라의 재상 자산(子産)이 기원전 536년 위기에 처한 국가를 개혁하려고 동양 최초의 성문법인 형서(刑書)를 공포했다. 그러자 법률에 밝고 궤변에 능한 등석이 정적인 자산의 개혁을 훼방 놓기 위해 법률을 악용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책으로 써서 퍼뜨리고 백성들에게 소송 기술을 가르쳤다. 백성들이 법을 지키지 않고 등석에게 돈을 주고 소송을 배워 악용하려는 바람에 정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다. 보다 못한 자산이 등석을 처형하자 비로소 민심이 안정됐다.

그 이후 중국 법제에서는 허위로 고소당한 사람이 처벌받을 수 있었던 죄형을 무고자에게 그대로 적용해 엄벌하는 반좌율(反坐律)이 확립됐다. 글을 아는 자가 남의 고소장을 대신 써 주는 것도 엄격히 제한됐다.

반면 송나라의 등사현은 악덕 변호사의 전형 같은 사람이다. 당시 강서(江西) 지역 사람들이 유독 소송을 좋아해 고소가 빈번하자 등사현은 소송 기술서를 저술해 팔았는데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가 가르친 소송 기법의 요체는 세 가지였다. ‘법조문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왜곡 해석하라’ ‘여의치 않으면 속임수와 모함을 써서 이기라’ ‘이도 저도 안 되면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 위협하라’. 이런 부도덕한 내용을 학교에서 공공연히 교육했다고 하니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고소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은 형사 사법의 시급한 과제다. 현행법상 고소장이 접수되면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의무적으로, 그것도 전력을 기울여 조사하도록 강제한다. 그 결과에 불복하는 고소인에게 항고나 재항고, 심지어 법원에 재정 신청까지 할 수 있는 무제한적 권리를 부여한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어떤 사람이 타인과 민사 분쟁을 하다가 고소를 당했다고 치자. 그에게는 형사상 책임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소를 당한 이상 꼼짝없이 피의자로 입건되고 조사받아야 한다. 조사 결과 무고함이 밝혀져도 고소인이 승복하지 않고 항고·재항고에 이어 재정 신청까지 제기하면 고소당한 사람의 괴로움은 끝이 없다. 사기·횡령 등의 고소 사건 중 혐의가 없어 불기소되는 비율이 80%에 육박한다. 절대 다수의 국민이 무고한 고소로 고통받을 위험성을 묵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고소나 소송을 좋아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런 만큼 고소를 부추기는 현재의 사법제도는 전면적인 재검토와 개선이 필요하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송사를 판결하는 데는 나도 남만큼 할 수 있다. 하지만 소송이 생기지 않도록 반드시 (사전에) 막겠다’(聽訟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고 말했다. 고소의 남발을 경계한 금언이 아닐 수 없다.

최재경=서울중앙지검3차장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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