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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대학은 위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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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해마다 세계 주요국가의 경쟁력을 조사해 온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소 (IMD) 의 '98년도 국가경쟁력보고서' 에 의하면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46개국중 35위다.

이는 전년보다 순위가 추락했다.

8개 부문 2백여개의 기준항목으로 평가한 결과여서 이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한국의 교육수준이 세계 3위로 평가된 점이다.

세계 3위라. 어쩐지 월드컵 16강에 분수없이 희망을 걸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의 숫자, 대학과 대학생수, 그리고 학부모들의 자녀교육열로는 세계 3위도 모자랄지 모른다.

그러나 교육의 질, 교육의 희망으로 과연 3위가 합당할까. 고등학교가 메마른 대학입시 학원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학에서도 자유와 낭만, 순수와 패기, 그리고 학문적 열정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 큰 원인은 순수과학이 설 땅이 차츰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수학.화학 등 자연과학 부문 순수과학은 의학.공학.약학 등의 응용과학에 밀리고, 철학.문학.역사학 등 인문사회부문 순수과학은 법학.경영학.신문방송학 등의 응용학과에 밀리고 있다.

순수과학이 뒷받침되지 않는 응용과학이 존재할 수 없는 데도 응용학문의 효율성이 기초학문의 정통성을 압도하고 있다.

그 결과 대학교육은 지성 (Intellectual) 의 추구가 아니고 지능 (Intelligence) 과 지식 (Knowledge) 의 전달에 매달린다.

대학의 도서관에 학생이 가득 차 있어도 학문적 분위기는 없다.

학기시험을 준비하는 골목길 독서실과 다를 바 없고 사법시험.행정고시 준비생의 자습장 이상의 아무 곳도 아니다.

여러 대학은 그것도 모자라 시험준비생을 위해 사법시험반.외무고시반.언론고시반이라는 독서실 또는 요 (寮) 를 마련해주고 있다.

최근 서울에 온 미국 하버드대 루딘스타인 총장은 '대학교육의 미래와 과제' 라는 연설에서 "대학에서 최선의 교육이란 직업적으로 생산력을 갖추도록 도와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보다 사려깊고, 보다 탐구적이고, 보다 완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데 있다" 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최선의 교육이란 "과학자들이 예술을 음미할 수 있게 하는가 하면 예술가들이 과학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 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전공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 이외에 철학에서 수학으로, 건축학에서 외국문학에 이르기까지 순수과학에 대한 폭넓은 지적 탐구를 유도하는 학문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교육풍토는 순수학문을 죽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교육부는 대학에 학부제 (學部制) 를 권고하고 대학은 학부제를 교육의 선진화로 착각하고 있다.

학부제의 취지는 학생들에게 전공선택의 기회를 입학 후로 미뤄 신중하고 다양한 전공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그러자면 그것은 기초학문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정책의 정착 (定着) 이 전제돼야 한다.

학생들은 응용과학과 자격시험 준비에 열중하고 대학이 거기에 맞춰 경영원리만 따진다면 결과는 기초학문의 고사 (枯死) 밖에 없다.

몇년전 한 대학에서 경영마인드를 도입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 사람이 총장이 됐다.

그는 "기업이 소비자의 뜻을 존중하는 것처럼 대학도 학생이라는 소비자의 욕구에 부응하도록 변해야 한다" 고 했다.

대학에서 기금조성이나 재무관리는 중요하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경영논리의 도입은 외국의 대학도 마찬가지다.

대학 총장을 선임 또는 초빙할 때는 기금조성의 능력도 참작한다.

그러나 그 평가기준은 아주 후순위다.

대학의 권위.교육철학.지적 (知的) 인격 등이 중요한 평가기준이다.

외국의 대학이 경영논리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것은 그보다 중요한 논리 - 아카데미즘 (Academism) 때문이다.

대학과 학생의 관계를 기업과 소비자관계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학의 권위, 아카데미즘을 송두리째 포기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초등학교 학생이 담임선생을 갈아달라는 연판장을 학교에 제출하고 대학 총학생회가 무엇을 교양과목에 추가하라고 '요구' 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대학이 자격시험 준비학원으로 타락하고 순수과학.기초학문을 무시한 채 경영논리만 내세운다면 학문을 탐구하 는 곳, 지성이 빛을 내는 곳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대학을 이 위기에서 건져 지성의 강, 문화의 산으로 다시 가꿔야 한다.

김동익(성균관대 석좌교수.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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