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경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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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호 33면

‘돈 될 만한 거 뭐 없나.’ 이런 궁리를 하는 사장님들, 예전엔 먼저 외국을 둘러봤다. 선진국을 본다곤 했지만 미국은 좀 멀어 보였고, 가까운 일본이 만만했다.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에서 잘나가는 것 유심히 봐 뒀다가 국내에 들여왔다. 이게 남보다 앞서는 비결이었다.

남윤호의 시장 헤집기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 그런 식으로 재미를 많이 봤다. 어디 대기업뿐이었나. 한 제약회사 사장은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예전엔 도쿄의 약국에서 여행가방 가득히 새로 나온 약을 사오는 게 출장이었다.” 그 다음은 말 안 해도 대충 감이 잡힌다. 방송국의 작가나 PD들도 일본 TV를 유심히 챙겨 보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뭣 하러 그랬겠나, 그냥 재미로 봤을 리는 없고….

이런 걸 좋게 말해 벤치마크라고 한다. 물론 본뜨고 베낀다고 해서 그냥 되는 건 아니다. 이것도 실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 물건 되겠다 싶은 것을 척 알아보는 선구안, 우리와의 미묘한 차이를 조정하는 변용력, 자기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포장술….

일본도 한때 이 방면에 열심이었다. 미국에 나가 이런저런 제품이나 사업 모델을 들여와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할 것 없이 한 발 앞선 미국의 산업과 문물은 일본엔 거의 교과서였다. 미국은 ‘일본의 미래’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 것을 일본에 들여오면 얼마 안 지나 반드시 성공한다는 믿음도 생겨났다.

이처럼 과거엔 미국과 일본 사이의 격차, 즉 경제 발전 단계의 시차가 컸다. 이를 이용한 비즈니스를 ‘타임머신 경영’이라고 한다. 한국계 일본 기업인 손 마사요시(孫正義) 소프트뱅크 회장이 지어 낸 말이다. 미래(선진국)로 가서 그곳의 제품이나 아이디어를 가지고 현재(자기 나라)로 돌아와 남보다 먼저 활용한다는 뜻이다. 그 자신도 이런 방식으로 큰돈을 벌었다.

사실 격차란 세상 어디에나 있는 거다. 소득과 임금의 차이, 금리의 차이, 기술의 차이…. 이런 차이가 있기에 돈과 사람과 기술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것 아니겠나.
그런데 요즘은 타임머신의 위력도 예전만 못해졌다. 무엇보다 선진국들이 금융위기로 제 앞가림을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국내에선 독자 기술을 꾸준히 개발해 자기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이른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굳이 외국에 나가 답을 구할 필요가 없는 곳들이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포스코 같은 거대 글로벌기업 얘기가 아니다.

국가대표 축구팀에 박지성 선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듯 이들보다 작지만 강한 기업들이 분명 존재한다. 히든 챔피언, 강소 기업…. 이름은 뭐라도 상관없다. 지난 1~3일 중앙일보가 연재한 ‘한국 기업의 힘’ 시리즈는 이들이 한국 대표 기업으로 쑥쑥 크고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그렇다면 우리 기업들이 애용하던 타임머신은 슬슬 퇴역할 때가 된 셈이다. 오히려 이젠 다른 나라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를 찾아와 뭐 가져갈 만한 게 없나 돌아보는 일이 자주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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