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측보행 … 아토피 없는 어린이집 … 그가 하면 표준이 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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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호 12면

‘88 서울올림픽’ 개최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선 매일 아침 10만 명 가까운 어린이와 청소년이 학교(유치원 포함)에 가기 위해 가방을 챙긴다. 송파구는 고교생 이하 학생 수가 서울에서 둘째(첫째는 노원구)로 많다. 구 인구는 68만 명으로 서울에서 첫째고 전주(63만 명)·청주(64만 명) 같은 웬만한 지방 대도시보다 많다.

WHO 공인 ‘안전·건강 도시’ 만든 김영순 송파구청장

이렇게 많은 사람이 좁은 땅(33.9㎢·약 1000만 평)에 몰려 살다 보니 도처에 사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학부모들도 자녀의 등하굣길 안전에 각별히 신경 쓴다. 그렇지만 실제로 송파에서 중대한 어린이 사고가 일어나는 일은 드물다. 예컨대 14세 이하 어린이의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인구 10만 명당 1.07명(2007년 기준)으로 전국 평균(3.1명)보다 크게 낮다. 서울의 25개 구청장 중 유일한 여성인 김영순(사진) 송파구청장이 2006년 7월 취임 이후 ‘어린이가 안전한 도시’를 최우선 정책 과제로 추진한 덕이 컸다.

안전을 위한 김 구청장의 노력은 시간이 지나며 하나하나 결실을 보고 있다. 최근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위원장 강만수)에서 내년 7월부터 전면 실시하겠다고 발표한 ‘우측보행’도 사실은 김 구청장이 앞장서 국가 정책으로 이끌어 낸 것이다. 이 밖에 아토피 없는 어린이집, 어린이 자전거 면허, 어린이 보호차량 인증제, 어린이집·유치원 ‘세이프티 닥터(전담 주치의)’ 등도 송파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김 구청장은 우측보행 전환과 함께 지난해 6월 말 세계보건기구(WHO) 공인 ‘안전도시’ 선포를 최고 성과로 자부한다. 지난달에는 WHO의 승인을 받아 ‘건강도시’도 선포했다. WHO에서 안전도시와 건강도시 두 가지 타이틀을 모두 받은 것은 서울에선 송파구뿐이다. 안전도시 선포 1년과 취임 3년을 맞은 김 구청장을 1일 오전 구청 집무실에서 만났다.

-WHO 공인 안전도시가 무슨 의미인가.
“안전도시는 ‘지역사회 구성원의 사고로 인한 손상을 줄이기 위해 지속적이고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도시’란 뜻을 갖고 있다. 서울에선 송파가 처음이고 전국적으로 몇 군데 되지 않는다. 그만큼 심사 통과가 까다롭다. 지난해 WHO 실사단이 와서 한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세계 130여 곳이 안전도시 인증을 받았지만 송파처럼 독창적인 프로그램은 처음 봤다. 송파가 세계적으로 선도 역할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다른 구청장들은 도로나 지역 개발 같은 인프라사업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안전은 중요하지만 자칫 ‘뜬구름 잡기’처럼 보일 수 있는데.
“솔직히 송파구는 개발사업을 벌일 예산이 별로 없다. 창피한 얘기지만 주민 1인당 예산은 서울 25개 구청 중 꼴찌다. 송파는 아파트단지가 많아 재산세 등 세금 수입이 넉넉할 것 같지만 오해다. 서울시가 재산세의 50%를 가져가 각 구청에 골고루 나눠 줘 우리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민들에게 출산장려금을 주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준다. ‘그렇다면 송파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고민을 많이 했다. 해답은 자매도시인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찾았다. 안전이 도시의 가치를 높일 뿐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까지 해결하는 것을 보고 ‘바로 이거다’고 생각했다.”

-안전에도 종류가 많다. 송파가 추구하는 안전은 어떤 것인가.
“흔히 안전하면 공사장이나 자동차 사고 예방 같은 하드웨어 차원의 안전을 생각하기 쉽다. 후진국일수록 이런 안전을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어야 했다. 그래서 소프트웨어 차원에서 접근했다. 직원들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모았다. 취임 후 통계를 보니 어린이 사고율이 서울의 다른 지역보다 높았다. 어린이 안전에 선택과 집중을 한 이유다. 아토피 없는 어린이집은 송파에서 시작한 것을 서울시가 채택하고 중앙정부가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어린이 자전거 면허를 비롯해 안전놀이터·안전보안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했더니 반응이 무척 좋았다.”

“장관이 못한 일 구청장이 해냈다”
-우측보행도 송파에서 가장 먼저 시작했다던데.
“그렇다. 안전을 위한 연구를 하다 보니 많은 경우 좌측보행이 사고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80여 년 전 우리에게 좌측보행을 강요했던 일본도 이미 오래전에 바꿨다. 내가 알기로 좌측보행을 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뿐이다. 한마디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2년 전 우측보행 실천 선포식을 했다. 사람들의 보행 습관을 오른쪽으로 유도하기 위해 주요 도로에 안내표지판과 배너를 설치하는 등 지속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최근 국가 정책으로 채택되면서 ‘장관이 못한 일을 구청장이 해냈다’는 격려를 받고 가슴이 뿌듯했다.”

-우측보행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차들은 오른쪽 길, 사람들은 왼쪽 길’ 하는 동요가 있다. 완전히 거꾸로다. 좌측보행을 하면 차와 같은 방향을 보고 걷게 된다. 차와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우측보행이 사고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또 오른손잡이는 짐을 들거나 걸을 때 자연스럽게 오른쪽을 선호한다. 그래서 회전문이나 엘리베이터도 모두 오른쪽으로 설계돼 있다. 그것을 무시하고 왼쪽으로 걸으면 보행자끼리 충돌 위험만 높아진다.”

탄자니아에 도서관 5개 지어줘
-안전도시에 이어 건강도시로도 WHO 공인을 받았다.
“송파는 건강한 삶을 위한 환경이 잘 갖춰져 건강도시의 심사는 어렵지 않았다. 송파는 근린공원 등으로 지정할 만한 산이 없는데도 공원 면적(178만㎡)은 서울에서 가장 넓다. 그만큼 생활 주변 가까운 곳에 공원이 많다는 뜻이다. 특히 청계천의 모델이기도 한 성내천을 자랑할 만하다. 콘크리트 제방으로 지저분했던 곳이 수생식물이 우거진 자연생태 하천으로 변했다. 다슬기·재첩처럼 1급수에 사는 생물도 발견됐다. 주민들이 스스로 모임을 만들어 하천 환경보호에 앞장서는 등 관심과 참여가 대단하다.”

-자전거 타기와 친환경사업에도 아이디어가 많다고 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백화점·할인점에 가면 포인트를 주는 ‘쇼핑 마일리지’는 송파가 가장 먼저 시작했다. 파리의 밸리브 같은 대여 자전거사업도 우리가 원조다. 전남 고흥에는 우리가 건설한 200㎾급 태양광발전시설도 있다. 여기서 나오는 연간 6억원 정도의 수익은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 재원으로 쓴다. 수익의 25%는 아프리카 등 제3세계 빈곤 국가에 지원하도록 규정했다. 이 돈으로 올봄에 탄자니아에 도서관 5개를 지어 줬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C40 세계도시 기후 정상회의’에서 이 사례를 발표했더니 많은 이가 관심을 가졌다. 세계 환경 전문가들도 송파를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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