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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그럼. 딴 생각을 가지면 구들농사가 제대로 되겠나. " "지금 와서야 고백하지만, 그 여자를 두 번째로 만났던 이후부터 꼭 한번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도대체 머릿속에서 맴돌면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절친했던 사이였다 해도 헤어지고나면 금방 잊혀지는 사람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여자는 그렇지가 않았어요. 만나보고 싶다는 설렘과 기대를 버릴 수가 없었어요. 봄철 지나고부터 진부장 매상이 신통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형님이 군소리 없이 진부로 향했던 것도 기도하는 것과 별다를 게 없었던 내 마음이 형님 가슴에도 전달되었기 때문이란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

"한선생은 항상 그렇게 남의 배려 속에서만 살아가나?" 언중유골이었다.

비꼬고 있는 변씨의 말속에는 승희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호가 듣고 있는 면전에서, 승희와의 미묘했던 관계를 공개적으로 거론할 수는 없었다. 지난 밤에도 철규는 한순간 그때의 일이 뇌리에 떠올랐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부담감이 오래가진 않았었다.

"뭐랄까요. 내가 느낀 것은 그 여자가 만나는 남자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잠자리를 같이하고 수틀리면 외면하고 돌아서기를 일삼는 막돼먹은 여자는 아니라는 신뢰감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남자라는 이름 한 가지로 그렇게 극진하고 세심하고 섬세한 대접을 받아본 적은 없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밤 사이에 옷 한 벌을 몽땅 세탁해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오늘 아침 집에서 출근한 기분입니다. "

"그렇다면 한선생 생각도 밤 사이에 많이 달라졌겠네?"

"달라지다니요? 기분이 그렇다는 것이지, 팔자를 고치겠다는 엉뚱한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여자가 좋아한 것은 강원도 행상꾼 한철규 이상도 아니었고 이하도 아니었을 겁니다.

딴 꿍심을 가지고 내게 접근했더라면 여자의 얼굴에 뚜렷하게 나타났을 테지요. 난 그것을 믿어요. 정말 어젯밤 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겠지만 어젯밤처럼 열정적이고 상큼했던 잠자리도 장차는 경험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침대에 눕지도 않고 사뭇 일어나 앉아서만 뒹굴었어요.

눕자면 순간적이나마 자세를 바꿔야 하는 절차가 필요하겠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서로 떨어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떤 경로로 우리가 한몸으로 일치되었는지 느낄 수 없었어요. 여자가 연출한 방의 분위기도 두 번 다시 재연하기가 어려울 것이란 생각도 들구요. "

"그 여자 장텃가를 기웃거리다가 떠돌이만 낚아채는 전담반에 소속한 여자 아냐?"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저도 얘기를 많이 나눠 봤는데 우리를 장돌뱅이라고 얕보고 들거나 잘난 척하는 기색도 없었어요. 교양있는 여자분 같았어요. " 철규가 대꾸해야 할 말을 가로채고 나선 것은 운전이나 얌전히 하고 있어야 할 태호였다.

발끈한 변씨가 삿대질로 면박을 하려다 말고 그만두었다.

용달트럭은 어느새 소나기재를 넘어 장릉 앞을 지나 영월대교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봉환이가 테러를 당하기 전에 그들의 계획은 행중을 두 패로 나누는 것이었다.

그중 한 패는 인제.양양.정선.진부.영월 같은 강원 내륙의 오일장을 찾고 다른 한 패는 삼척.묵호.강릉 같은 해안도시의 오일장을 돌아서 한 파수에 한번씩 주문진에서 다시 만난다는 계획이었다.

승희의 낌새를 보자면 어차피 일행에 합류할 것 같았고, 윤종갑이도 항상 주문진에만 머물게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행중의 인력을 짜임새 있게 운용할 수도 있었고, 매상도 현재 이상을 넘겨다볼 수 있었다.

변씨가 군소리 없이 따라나선 것도 어쩌면 영월 노정은 이번 기회가 아니면, 좀처럼 다시 찾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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