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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밥통과 소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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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오후 4시45분에 시작된 저녁 급식이 한창이었다. 배낭을 멘 노숙인들이 스테인리스 식판에 밥과 반찬을 받아 자리에 앉아서 묵묵히 식사를 했다. 메뉴는 밥과 돼지고기·감자볶음, 야채무침, 김치·깍두기, 시래기국. 대학생 자원봉사 동아리 ‘다솜회’ 회원들이 배식 일을 맡고 있었다. ‘안나의 집’ 오현숙(55·사회복지사) 사무국장은 “세상에서 밀려나 노숙인이 된 뒤 ‘만성 노숙인’이 될 지, 다시 사회에 복귀할지는 대개 6개월~1년 안에 결정난다”고 말했다. 노숙인들은 대개 일정한 거처가 없다. 관청의 지원이 인색한 데 대해 오 사무국장은 “노숙인이나 어린이·청소년은 표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표가 되는 노인 복지시설에는 돈이 몰린다는 것이다.

밥에도 종류가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해먹는 밥이 제일 든든하다. 여력이 있어 남에게 떠먹여 주는 밥은 성스럽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축복”이라는 말도 있다. ‘안나의 집’에서는 자원봉사자든 노숙인이든 밥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있었다. 노숙인들은 이 집에서 퍼 준 밥 먹고 힘을 내 일용 잡부든 중국집 주방 일이든 희망을 찾아 나설 것이다. 밥통에도 종류가 있다. ‘안나의 집’을 찾은 노숙인들에겐 물론 밥통조차 없다. 그러나 바깥 사회의 밥통은 철밥통, 플라스틱 밥통, 비닐봉지 밥통, 종이봉지 밥통들로 엄연히 구분되는 게 현실이다. 요즘 사회 문제로 부각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기껏해야 유효기간 2년짜리 비닐봉지나 종이봉지 밥통을 갖고 있었다. 정부·국회·양대 노총이라는 ‘철밥통’들이 며칠 전 그들의 비닐 밥통·종이 밥통을 무참히 찢어버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화가 난다.

“비정규직 보호법을 개정하지 않아도 ‘고용 총량’에는 변화가 없다”고 야당과 양대 노총은 주장한다. 자기들 철밥통과는 상관없으니 나오는 얘기다. “해고돼도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채울 테니 총고용에는 변화가 없다”는 말에서 나는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 수치에 불과하다”는 궤변이 풍기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들은 예상 해고자 숫자를 놓고 누구 말이 옳은지 보자며 ‘통계 내기’를 시작했다. 생체실험을 하면서 얼마나 빨리, 많이 죽는지 내기하는 꼴이다. 국회에 계시는 의원 295명을 싹 다 몰아내고 의원 할 사람을 모집하면 전국에서 구름같이 몰릴 것이다. 국회 ‘총고용’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양대 노총 조합원들이 일하는 대기업 일자리를 싹 비우면 취업난에 시달리던 젊은이들이 벌떼같이 달려들 것이다. 역시 ‘총고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승수 국무총리가 그제 말했다.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고 조직이 안 돼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맞는 말이다. 비정규직들은 밥통이 약해 소통할 능력조차 없다. 그러니 철밥통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차이는 신세가 되지 않았나.

‘안나의 집’ 한편에서는 노숙인들에게 헌 옷을 공짜로 나눠주고 있었다. 멀쩡해 보이는 한 노숙인이 청바지 한 벌 외에 다른 옷들도 챙기려 했다. 자원봉사자가 “1인당 한 벌입니다. 다른 분 생각도 하세요”라고 제지하자 그는 욕을 퍼부으면서도 순순히 빠져나갔다. 그러고 보니 술 취한 노숙인에게는 식사를 주지 않는 게 이 집의 첫째 규칙이었다. 국회에서도 안 지키는 규칙이 그래도 노숙인 사회에서는 지켜지고 있었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