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금녀의 문 연 '문학소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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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최초로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 제청된 김영란 대전고법 부장판사가 23일 남편 강지원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축하를 받고 있다. [강정현 기자]

항상 책을 가까이했던 문학소녀, 병든 시부모를 10년간 돌본 효부(孝婦)….

사상 첫 여성 대법관에 제청된 김영란(48) 대전고법 부장판사. 주변 사람들은 '인간 김영란'을 이렇게 묘사한다. 공무원 아버지 밑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때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했다.

어릴 적 책을 끼고 살았다는 김 부장판사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백일장에서 큰 상을 받아 TV에도 출연했다. 지금도 책을 보다 잠들기 일쑤인 책벌레다. 문학도를 꿈꿨지만 가족의 거듭된 권유로 법대를 택했다.

그는 최근에도 주변 사람에게 "내가 그때 조금 더 우겼으면 판사가 안 됐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대학 시절에는 서울대 교지 편집위원으로 창간호를 만들었고, 직접 쓴 단편 소설을 교지에 싣기도 했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은 대학 4학년 때. "딱 1년 준비해 한 번만 쳐보고 그만두겠다"며 본 시험에 덜컥 붙어 법관의 길을 걷게 됐다. 법원 내에서는 가족법과 소년법 문제에 이해가 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5월 '왕따' 피해를 본 학생과 부모가 낸 소송에서 약자에 대한 학교의 배려를 강조하며 "피해 학생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 스스로도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이라고 한다.

2002년에는 이상희 변호사 등 이른바 '민족민주혁명당' 사건 구속자 4명이 "국가정보원이 변호인 접견권을 침해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형사부 경력은 2년뿐이어서 시국 사건 등 민감한 판결은 많지 않다. 일부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혁성이 실제보다 다소 과장된 면이 있다는 지적도 한다.

남편은 검사 출신으로 전 청소년보호위원장인 강지원(55)변호사고, 서울중앙지법 김문석(45) 부장판사가 남동생인 '법조 집안'이다. 강 변호사와는 '서울지검 검사'와 '검찰 시보'로 만나 1년간의 열애 끝에 1982년 결혼했다.

그는 "법률사무소(정치)의 대표변호사직을 사퇴하고 청소년.여성 등 공익적 사건을 중립적으로 맡겠다"며 외조에 전념할 뜻을 내비쳤다.

큰딸(21)은 전남 담양의 대안학교인 한빛고를 나와 미국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 중이다. 작은딸(17) 역시 경기도의 한 대안학교에 재학 중이다. 부모가 전형적인 엘리트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아이들만큼은 개성을 중시하는 교육을 받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김 부장판사는 23일 오전 제청받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재판받는 사람들의 말을 이해될 때까지 들으려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현경.천인성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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