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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산하 북녘풍수]21.대성산성과 안학궁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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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단군릉 답사 후 오후에는 대동강 지류인 합장강을 건너 대성산으로 향한다.

대성산에는 가장 북쪽에 국사봉이 있고 동쪽에는 최고봉인 장수봉과 을지봉, 남쪽에는 소문봉, 서쪽에는 주작봉이 있는데 그 봉우리들을 대성산성 (국보유적 제8호) 이 빙 둘러싸고 있다.

주작봉 줄기가 내려오다가 매듭을 맺는 곳 (節脈處)에 혁명렬사릉이 조성돼 있고 그 아래로는 대성산류희장과 중앙동물원이 있어 평양시민들의 휴식공간 노릇을 하고 있다.

고구려는 장수왕 15년 (427)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다.

그 당시 천도하면서 처음 정한 자리가 대성산 일대다.

왕궁은 안학궁이었고 수도 방어를 위해 쌓은 산성이 대성산성이었다.

그러다가 새로운 도성인 평양성 - 장안성을 쌓고 수도를 옮긴 것이 평원왕 28년 (586) 이니 대성산일대는 1백60년 동안이나 고구려 수도가 됐던 셈이다.

대성산은 그 성격으로는 수성 (水星) 이지만 형태로는 일별하여 토성 (土星) 을 취하고 있다.

토성은 풍수에서 산 정상부가 밋밋한 형태를 가리키는 용어인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제단 (天祭壇) 을 닮았다 하여 도읍의 주산으로서는 무척 높이 보는 산형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대성산성의 특징을 꼽자면 성안에 물이 풍부하다는 점일 것이다.

기록에는 성내에 99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돼 있지만 실제 지표조사를 해보니 무려 1백70여 군데에서 우물터가 발견됐고 그중 80여 곳은 복원까지 마친 상태라고 했다.

별로 우람한 산세도 아닌데 그렇듯 많은 우물을 팔 수 있는 곳을 수도의 주산으로 잡을 수 있었다면 당시 사람들이 '땅의 이치 (地理)' 를 보는 솜씨는 신기에 가까왔다고 할 만하다.

고구려가 이곳에 터를 잡은 5세기 경은 아직 중국으로부터 풍수지리설이 도입되기 전이다.

따라서 우리식 지리학 즉 자생풍수의 실력과 위력이 대단했다는 뜻이 되므로 나로서는 반가운 예가 아닐 수 없다.

'여지승람' 이 기록하고 있는 대성산성의 둘레는 2만4천3백척, 약 7㎞에 달한다.

그중 2백m 정도는 복원됐고 나머지도 군데군데 그 흔적을 남겨 놓았다.

63년 복원했다는 소문봉 정각에서 바로 아래 있는 안학궁지 (安鶴宮址) 를 바라본다.

고구려는 왕궁 거점으로서의 평산성 (平山城) 인 안학궁과 비상시 방어 겸 대피처인 대성산성을 같이 축조했다.

안학궁이라는 궁이름은 학이 편히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문봉의 생김새에서 유래됐다는데 그건 아무래도 훗날 지어낸 말 같다.

실제로는 산에 감싸안긴 곳, 즉 안쪽이란 뜻으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동행한 중앙력사박물관의 리정남선생도 내궁 (內宮) 의 뜻으로 쓰인 말일 것이라며 내 생각에 동의해주었다.

안학궁터 (국보유적 제2호) 주변은 상당히 넓은 들판이다.

궁터를 잡으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바른 네모꼴 (正四角形) 을 취할 수 있는 조건의 땅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안학궁터를 보면 뒤쪽, 즉 북쪽으로는 대성산에 기대 그 지세를 이용했고 벌판쪽으로 난 나머지 삼면은 이상하게 찌그러진 형태다.

북동쪽으로 6도 정도 기울었고 서쪽으로 10도쯤 기울어진, 그러니까 눌러놓은 정사각형이나 불규칙한 마름모꼴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한마디로 기하학적인 균형이나 조형미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형태다.

그런데 묘하게도 주변의 자연지세와는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준다.

결국 어떤 인위적 이론에 의한 축성이 아니라 풍토에 적응시켰기 때문일텐데, 역시 자생풍수의 영향을 여기서도 볼 수가 있다.

소문봉 품안에 안학궁을 들어 앉히는데 그 품을 인위적으로 재단하여 균형을 취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 품에 안길 수 있도록 조화를 추구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중국풍수가 균형을 강조한다면 우리 풍수는 조화를 중시한다.

이것은 중국 역대 수도의 궁궐 배치와 고구려.백제.고려의 수도 궁궐 배치를 살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후대에 이르러 중국 풍수의 영향을 받은 뒤에 건설된 서울의 궁궐, 특히 정궁인 경복궁의 경우는 조화보다는 기하학적 균형 감각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문봉 앞쪽 (풍수적으로는 案山에 해당한다) 으로는 길게 낮으막한 둔덕이 동북동 - 서남서 방향으로 지나가는데 이 또한 안학궁의 남쪽 성벽과 흐름을 같이 한다.

자연에 조화로운 것이다.

굳이 안산이라고 칭할 만한 산은 그 중 가장 높은 해발 30m정도의 산이고 나머지는 그에 잇대어 줄을 지어 쳐놓은 병풍처럼 보인다.

안학궁성은 토석혼축성 (土石混築城) 으로 도로에서 소문봉을 향하여 들어가다 보면 그 흔적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보존이 잘 돼 있다.

이곳 발굴에 직접 참여했던 리선생의 안내로 남문터를 찾았다.

그 터에는 안내판이 붙어 있고 주춧돌이 서있던 자리가 우묵하게 여러 곳 보인다.

고려 정궁인 만월대가 39만㎡인데 안학궁이 38만㎡이니 5세기의 축성으로는 실로 거대한 규모라 아니할 수 없다.

멀리서 보면 완전한 평면처럼 보이지만 실제 가서 보니 소문봉을 향해 계단식으로 점차 올라가는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자연 지세를 흐트리지 않고 풍토에 적응시키려는 자생풍수적 축성이라 생각된다.

발굴 결과에 따르면 남벽은 높이가 2.3m, 남벽에만 성문이 3개 있었고 나머지는 각 방위별로 1개씩 있었다고 한다.

대성산은 길이 잘 닦여 있다.

소로의 시멘트 포장길인데 산책이나 간단한 등산로 혹은 조깅코스로 이용하면 알맞을 듯하다.

주변에는 곳곳에 쉼터가 마련되어 있고 우물도 곁에 있다.

물 하나는 정말 풍부한 산이다.

새소리가 시끄러워 물어보니 '박새' 라 한다.

꼭 참새만한 놈들인데 색깔은 더 곱다.

새소리에 숲을 헤지며 지나가는 겨울 바람소리가 스산하기보다 정취를 더 한다.

한가지 큰 아쉬움이 있다.

대성산성으로 오다가 건넌 합장강 상류를 따라 올라가면 평양시 룡성구역에 대화궁 (大花宮) 터가 있는데 이를 보지 못한 것이다.

대화궁은 고려 인종 때의 신궁으로 묘청 (妙淸) 의 풍수지리설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묘청은 스스로 자생풍수의 시조인 도선국사 (道詵國師) 의 맥을 이었다고 자부한 인물인 만큼 그의 터잡기가 지니는 의미는 실로 크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이 자생풍수에서 얼마나 중요한 곳인가는 묘청의 말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대신하기로 한다.

"이것 (대화궁 터잡기 방법) 은 태일옥장보법 (太一玉帳步法) 인데 도선선사께서 강정화 (康靖和)에게 전하였고 그가 다시 내게 전하였으며 나는 늙으막에 백수한 (白壽翰) 을 얻어 전하였으니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대화궁이 자생풍수에서 얼마나 중요한 곳인가를 알 수 있다.

자생풍수를 찾는 나로서는 이번에 직접 답사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다음은 마지막회로 '동명왕릉'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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