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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시장 만능주의의 함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요즘 시중에서는 빅딜.빅뱅 등을 두고 그 방법과 효과에 대해 논의가 한창이다.

대기업 산하 20개 기업을 포함해 55개 기업이 퇴출 대상에 올랐는가 하면 지난달 29일에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은행이 문을 닫아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주요 은행은 살아남았지만 후발은행과 지방은행을 합해 5개 은행이 폐쇄됐다.

기업의 퇴출과 은행의 폐쇄는 필연적으로 실업과 금융경색을 초래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노동부문의 불안과 기업의 연쇄부도가 끊이지 않을 것임을 우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때문에 재계.금융계.노동계는 다같이 참담한 분위기에 휩싸여 어쩔줄 모르고 있다.

경제의 기본구조를 이렇게 흔들어도 되는 것이냐고 반론을 제기한다.

혹자는 개혁을 하되 시장원리에 입각해 민간에 유인책을 주는 방식으로 하는 편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이는 개혁의 당위성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우리 모두가 때때로 망각하는 것은 한국 경제가 현재 미증유의 파국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현실이다.

달러로 계산한 실질 국내총생산 (GDP) 감소액은 6.25로 인해 파괴된 국부 (國富) 의 50배에 달한다는 계산도 나와 있을 정도다.

총탄이 생명을 위협하지 않을 뿐이지 문자 그대로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엄청난 국난의 상황인 것이다.

금융부문과 노동부문에선 이미 시장이 파괴된 상태다.

우리 경제는 지금 대동맥에 큰 이상이 발생한 심장병환자라고 봐야 한다. 이 환자가 살 길은 촌각을 다투어 수술을 단행하는 일이다.

막힌 동맥을 뜯어내고 '바이패스' 수술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수술시간을 잘 잡고 수술 중 필요한 도구와 혈액을 미리 갖추어 놓고 유능한 외과 수술의와 보조진을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다.

수술에 성공해 소생한 환자는 수술 후 병관리만 잘하면 얼마든지 정상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술.담배를 끊고 육식을 줄이며 스트레스나 과욕을 피하는 생활을 해나가면 오히려 전보다 더 활력있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새로 등장한 대통령이 개혁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고 국제통화기금 (IMF).세계은행.기타 국제 금융기관들로부터 개혁 과정에서 필요한 도구와 혈액 (정책협력과 외화보유고) 을 얻어놓은 상태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보조진의 팀워크가 제대로 돼 있는지, 그리고 개혁의 결행시점을 잘 선택하고 있는지, 또 개혁 이후의 사후 관리를 위해 변화를 수용하겠다는 전국민의 비장한 각오가 서 있는지에 대해서는 낙관과 비관이 엇갈린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개혁의 수순과 완급에 차질을 빚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제는 개혁해야만 살아난다. 부실기업을 퇴출시키고 자산가치가 없는 은행을 폐쇄시키는 조치는 불가피하다.

우리는 금융개혁을 논할 때 영국의 경우와 일본의 경우를 많이 예로 든다.

지난 80년대 초 영국의 금융 빅뱅은 국내적으로 금융업종간 장벽을 철폐한 것과 국외적으로 외국의 금융기관에 1백% 시장을 개방한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이 과정에서 국내 정치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대처 총리의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와 당시 재무장관이었고 후에 부총리까지 지낸 제프리 하우의 살신성인적 결단이 빅뱅을 성공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는 금융개혁의 성공이 의문시되는 사례로 꼽힌다.

소위 '가교은행' 을 설립해 부실채권을 정리한다고는 하나 개혁에 소극적인 대장성 (일 재무부) 의 막강한 권한 하에서 은행들이 스스로 합병이나 외국은행과의 제휴 등을 통해 효율성을 제고시킬 수 있을지 아직은 미지수다.

우리나라의 경우와 같이 몇 개의 부실은행을 과감히 폐쇄시키는 조치는 생각지도 못할 형편이다.

일본 노무라 (野村) 증권의 한 간부사원은 일본 금융계.관계의 빅뱅은 결국 불가능할 것이고, 오히려 한국이 이번 금융개혁에 성공할 경우 일본보다 먼저 금융산업의 선진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과거 30여년의 누적된 모습을 시장에 맡겨 개선한다는 것은 배부른 사람들의 얘기다.

우리에겐 발빠른 개혁밖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

( 柳莊熙)

◇필자약력 ▶57세 ▶서울대경제학과 ▶미텍사스 A&M대학원 경제학 박사 ▶미 클라크대.버지니아 커먼웰스대교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 (현) ▶저서 : '경제학의 새 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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