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산하 북녘풍수]20.단군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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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12월 19일 오전 9시 '단군릉' 을 향해 출발한다.

차는 곧 평양의 실질적 진산 (鎭山) 인 대성산 자락을 지난다.

대성산은 구룡산 (九龍山) 혹은 노양산 (魯陽山) 이라고도 하는데 산마루에 아흔아홉개의 못이 있어 날이 오래 가물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길가에서 보이는 대성산쪽을 바라보면 소문봉이 제일 높다랗게 솟아있다.

그러나 실제 최고봉은 장수봉으로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연개소문을 기려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소문봉 꼭대기로는 '소문봉정각' 이란 정자가 아련히 보인다.

언뜻 보기에는 밋밋한 토성 (土星) 의 산체지만 나중에 자세히 관찰하니 물뱀이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는 형국의 수성 (水星) 임이 분명하다.

주변은 역시 질펀한 '벌방 (평야)' 이다.

길가에는 회색의 2, 3층짜리 연립주택들이 죽 늘어서 있는데 조금 안쪽으로는 단층집들도 여럿 보인다.

대성산을 제외하면 일대에 산은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낮은 둔덕에 잔솔밭이 덮여 있는, 우리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농촌의 그것 그대로다.

간혹 눈에 띄는 '다락밭 (계단식 경지)' 의 흙색깔은 진적색으로 꽤 걸어 보인다.

밭은 과수원으로 많이 이용되는 듯했다.

둔덕 여기저기 나지막한 재래식 무덤들도 눈에 띄고 길은 조그만 야산인데도 터널을 뚫은 곳이 몇군데 있다.

대동강에는 모두 여섯 곳의 갑문이 건설돼 있는데 차는 그중 중류인 평양시 삼석구역과 강동군을 연결하는 봉화갑문을 지난다.

현재 북한에는 면 (面) 제도가 없는 탓에 강을 건너면 바로 강동군 봉화리가 된다.

그 부근에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전쟁 후 농촌 현대화를 위해 벌방 가운데 3층짜리 집체식 주택 (집단주택) 을 지어 주었는데 주민들이 싫어하더라는 것이다.

뚜렷한 이유를 대지도 못하며 무작정 싫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었는데 나중에야 그들이 산자락에 의지해 살던 버릇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그들이 원하던 산자락으로 집을 옮겨주니 정을 붙이고 살더라는 얘기다.

이런 얘기는 남한에도 여러 사례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계화도 간척지의 경우다.

지금도 그곳 주민들은 생산성을 생각해 들판 가운데, 그러니까 농경지 가까이 마을을 조성하는 게 아니라 본래 육지였던, 둔덕이나마 명색이 산이랄 수 있는 곳에 터를 잡고 살아간다.

봉화리에서 조금 더 가자 단군릉이 있는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에 닿는다.

현재의 단군릉은 본래의 능묘 위치에서 5㎞쯤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이렇게 되면 단군릉을 풍수적으로 평가한다는 게 조금은 우습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사람들이 어떤 터를 선호했는지가 관심사였는데 최근 옮겨온 것이라니 실망감이 없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김일성 (金日成) 주석이 "1993년 9월 친히 현지를 찾으시어 능터를 잡아주시고 시조릉 개건의 웅대한 설계도를 펼쳐 주시었다" 니 거기 내가 헤아리지 못할 깊은 뜻이 들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결론적인 얘기지만 金주석의 풍수적 안목은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군릉은 대박산에 병풍처럼 감싸여 있고 대박산 동남쪽의 절맥처 (節脈處) 를 그 혈장 (穴場) 으로 삼은 듯하다. 대박이란 박달나라의 큰 임금이란 뜻이니 즉 단군이다. 산의 북동쪽은 연맥 (連脈) 인데 아달산이다.

일연의 '삼국유사 (三國遺事)' 에서 단군의 도읍이 아사달이라 한 것을 보면 그것과 관련된 지명이 아닌가 짐작된다.

서쪽도 낮은 구릉이고 상당히 넓은 들판을 건너 남쪽으로는 동서 방향으로 산들이 수성의 형자 (形姿) 를 취하고 있으니 현무 (玄武).주작 (朱雀).청룡 (靑龍).백호 (白虎) 의 사신사 (四神砂) 를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명당 형세다.

대박산은 크게 보아 금성 (金星) 이고 조안 (朝案.명당의 앞쪽을 말한다) 방향이 수성이니 금생수 (金生水) 의 상생관계요, 좌향 또한 자좌오향 (子座午向) 의 정남향이라 중국식 이론풍수가들이 보자면 대단한 길지 (吉地) 라는 얘기도 나올 법하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벌판 남쪽 귀퉁이를 흐르는 수정천이 동에서 서로 흘러 대동강에 합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명당수 (明堂水)가 서출동류 (西出東流) 하기를 바라는 지관들의 관점에는 어긋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관계가 없다.

우리식 자생풍수는 오직 풍토 적응성에 관심을 가질 뿐 고사성어 (故事成語) 식으로 된 풍수원칙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완공연대가 1994년이므로 1천9백94개의 화강암으로 쌓았다는 봉분의 거대함은 한마디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일제의 도굴로 유물은 별로 출토되지 않았다는데 역시 중요한 것은 남녀 두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일 것이다. 나중에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서 단군과 그 '안해' 의 진품 유골을 볼 수 있었다.

거기서의 설명으로는 '단군' 뼈는 1백70㎝ 정도 되는 기골이 장대한 70세 노인의 것이고 그 왼쪽에 있던 '안해' 의 유골은 노동을 모르고 자란 귀족 출신으로 30세쯤 돼 보이는 젊은 여성의 것이라 한다.

이처럼 유골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능이 석회암 지대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스며든 광물질이 작용해 유골을 화석화했기 때문이며 또 유골을 부식시키지 않는 전형적인 중성 토양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단군에 얽힌 설화 한가지를 소개한다.

우리나라 명산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마고할미설화란 게 있다.

마고할미는 일종의 여성 산신으로 보면 될 텐데 그 마고할미가 단군과 화해한 전설이 강동군 남쪽 구빈마을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단군이 거느리는 박달족이 마고할미가 족장으로 있는 인근 마고성의 마고족을 공격했다.

전투에 진 마고할미는 달아나서 박달족과 단군족장의 동태를 살피는데 알고 보니 자기부족에게 너무도 잘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마고할미는 단군에게 심복하게 됐고 단군은 마고할미의 신하인 아홉 장수를 귀한 손님으로 맞이해 극진히 대접했다.

그 아홉 손님을 맞아 대접한 곳을 구빈 (九賓) 마을이라 하고 마고할미가 단군에 복속하기 위해 고성으로 되돌아오며 넘은 고개를 왕림 (枉臨) 고개라 한다는 것이다. 단군과 마고는 둘 다 자생적인 우리 민족 고유의 신이다.

하나는 남성이고 또 하나는 여성이란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그런 두 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화해하고 하나가 됐는가.

과문의 탓인지는 몰라도 그걸 말해주는 설화를 남녘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이번에 북녘에 와서 그 설화를 접하니 결국 우리 고유의 신은 어디선가는 합치는구나하는 묘한 감회에 젖어들게 된다.

글 = 최창조.그림 = 황창배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차장)

※다음 회는 '대성산성과 안학궁터'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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