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이창호 미스터리' 그는 방패인가, 창인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진정한 천재는 태양의 돌 이세돌이다."

"특히 존경스러운 것은 이창호의 얼굴이 풍기는 느낌이다. 천박함이나 사이(邪異)함이 조금도 없다."

왕위 타이틀을 놓고 맞붙은 이창호9단과 이세돌9단의 빅매치에 인터넷도 뜨겁고 달궈지고 있다. 양쪽의 팬들은 자신들의 우상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있을 뿐만 아니라 '이-이대결'엔 의미심장하고도 운명적인 그 뭔가가 있다고 믿는다. 바로 이런 점이 돌부처 이창호에게도 자극을 주었을까.이창호9단이 제주도의 1국과 서울의 2국에서 판이한 두얼굴을 보여줬다.

제주도의 1국(16일)에서 이창호는 초반의 우세를 지키고자 타고난 신중함과 견실함을 바탕으로 수비에 총력을 기울였다. 자존심을 긁는 이세돌의 흔들기에도 묵묵히 인내했다. 그러나 결과는 3집반 패배. '황금방패'를 지녔다는 수비의 천재 이창호가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이창호와 맞붙어 종반에 역전승한 이세돌의 끝내기 능력에 대해 찬사가 쏟아졌다.

서울의 2국(20일)에서 이상한 현상이 목격됐다. 이창호가 중반 이세돌의 미생마에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이창호와 싸워본 많은 강자가 "이창호는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으나 그 예상은 철저히 빗나갔다. 이창호는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줄기차고도 집요해 기보만 본다면 흑백이 뒤바뀐 것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물론 이창호는 마지막 승리가 확정된 장면에서 공격을 그만두고 대마를 살려줬다).

안정-수비-타협-계산의 이창호,그리고 변화-공격-전투-즉흥의 이세돌이란 세간의 인식은 앞으로 수정돼야 할지 모른다. 이창호의 내면엔 얼음과 불이란 두 얼굴이 존재하며 불의 진면목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장면1=인내, 그리고 패배

도전기 제1국. 이창호9단이 흑이다. 시종 견실한 수비를 바탕으로 박빙의 리드를 지켜왔으나 이세돌9단의 강렬한 저항에 부닥쳐 바둑은 형세불명의 상황으로 변모하고 있다. 중앙 흑? 한점의 탈출 여부가 초미의 관심인 가운데 흑1로 응수를 물었다. 이때 2로 뛰어든 수는 이세돌다운 사나운 도전이었으나 무리수. 하지만 이창호는 상대의 도발을 흑 3, 5로 인내했고 이 굴복은 A의 고약한 뒷맛을 남겨 곧바로 패배로 이어졌다. 3으로는 B로 공격했으면 흑승이었다(결과=이세돌 3집반승).

◇장면2=공격, 그리고 완승

도전기 제2국. 아래쪽 미생마를 슬쩍 외면한 이세돌의 흑?가 도발적이다. 이 대목에서 수많은 강자가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공격하더라도 척만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창호는 3, 5로 즉각적이고도 통렬한 공격을 퍼부었고 9로 눈을 뺏는 독수를 두었다. 이후에도 무시무시한 패를 각오하며 10여수나 공격을 계속해 상대를 밀어붙였다. 타개의 명수로 불리는 이세돌은 이 공격에 허물어졌다(결과=이창호 불계승).

박치문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